시인의 말
나는 1952년 시월에 태어났다. 우리 나이로 예순아홉이다. 이런 시절이 오리라고 상상한 적이 없다. 1982년 문단에 이름을 올렸으니, 시인으로 산 세월이 무려 사십여 년에 이르고 있다. 그 동안 삼백오십 여 편의 시를 다섯 권의 시집에 실어 펴냈다. 작품은 많지 않았으며, 그나마 좋은 작품도 눈에 띄지 않았다. 내 시의 일엽편주들은 다 어디로 흘러갔는지 알 길이 없다. 시인으로서 직무를 심각하게 유기한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런 회한과 반성이 내 여섯번째 시집이자 첫 번째 시선집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를 펴내는 에너지가 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보잘 것 없는 작품 속에서 거의 영원에 가까운 서정의 생명력을 찾은 것이다. 이십여 년 전에 쓴 작품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가 지금도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오래, 그것도 아주 오래 살아 숨실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 작품은 이렇게 끝난다. 〈세상을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건널 수 없음이여.> 그렇지 않은가.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건널 수 있는 세상은 지금까지 없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없지 않겠는가. 이 작품은 서정은 지금까지 있어온, 앞으로 있을 세상의 모든 패러다임을 꿰뚫고 지나가는 유력한 생명 에너지임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술을 한 잔 하지 않을 수 없다. 술의 힘을 빌어 도를 넘어도 한참 넘는 자화자찬을 하나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나는 작품을 고르고 있었다. 다섯 권의 시집을 뒤져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놈이 있나, 아직 맥박이 뛰는 놈이 있나 하면서, 칠십여 편의 시를 고르고 있는 나를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직 한참 어린 예순아홉이다.
2020년 2월
김선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