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산문
까페 까르팡의 그네
김선굉
이런 명제는 어떨까. <시는 그네다.> 너무 간명한 은유인가. 그렇다면 이 정도면 어떻겠는가. <좋은 시는 가슴에 매다는 아름다운 그네다.> 좀더 구체화된 느낌이 드는가. 가령 가슴 속에 멋지게 솟구친 소나무 한 그루가 이리저리 가지를 뻗고 의젓하게 서 있다면 거기에 멋진 시의 그네를 매달면 되겠다. 기왕이면 줄은 튼튼한 마닐라 로프로, 발판은 두툼하게 잘 제단된 소나무나 가죽나무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어깨 높이쯤에 흰 무명천으로 손잡이 샅바를 묶어두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네와 관련된 어떤 수사도 결국 <시는 그네다>라는 간명한 명제로 회귀된다. 거의 운명적이다. 내가 쓴 어떤 시 한 편이, 가령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가, 아니면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가, 아니면 다른 어떤 작품하나가 언젠가, 어디에선가 누군가의 가슴에 그네로 걸려 흔들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는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아양교 근처에 살고 있다.
오년 전 금호강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삼십년이 넘는 5층 아파트 삼층을 사서 수리를 해서 살고 있다. 기본적인 것만 한다고 했는데, 워낙 허술해서 당초 예정한 금액보다 두 배가 넘게 들어간 대대적인 리모델링이 되고 말았다. 삼층 서재에서 내려다 보면 장강의 위용을 갖춘 금호강이 넘실거리며 흘러가고 있는 게 보인다. 요즈음은 물닭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 뒤뚱거리며 놀고 있는 모습이 제법 볼 만하다. 온몸이 새까만 깃털로 덮인 채 콧잔등에 하얀 점을 뚜렷이 찍은 물닭들이 참 이쁘게 놀고 있다. 그 너머로 저 멀리 팔공산의 주능선이 위용을 드러내며 다가온다. 이 낡은 아파트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매력은 바로 앞에 도시철도 1호선 아양교역이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아파트는 원시 자연의 금호강과 첨단 문명의 도시철도가 기가 막힌 조화와 대비를 이루고 있는 삶의 터전이다.
지난 연말 아양교역 1번 출구 바로 앞에 커피집 까르팡이 생겼다. 대문자로 CARRE PAN이라고 쓰고 까르팡이라고 읽는다. 프랑스어로 까르가 광장이니, 광장에 있는 찻집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실내 디자인이 대단히 감각적이다. 인테리어라고 하지 않고 실내 디자인이라고 하는 것은 공간구성과 소품 배치가 일반적인 인테리어 수준을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미니멀리즘.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도시적 감수성이 느껴지는 공간 구성이다. 내게 까르팡은 집 근처에 단순히 괜찮은 커피집 하나가 더 생겼다는 의미를 훌쩍 뛰어넘는다. 그것은 가게 안 높은 천정에 매달린 그네 때문이다. 바로 그 그네가 <시는 그네다> 라는 좀 엉뚱한 명제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그네 곁에 만화며, 시집이며, 제법 읽을 만한 책들이 비치되어 까페의 품격을 한껏 높여주고 있다.
맨처음 까르팡의 문을 밀었을 때, 나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입문에서 가장 먼 안쪽에 그네가, 그것도 아주 멋진 그네가 매어 있었던 것이다. 그네가 맞나 하면서 가까이 가 보았더니, 5미터가 훌쩍 넘는 높은 천정에 마닐라 로프를 길게 늘어뜨린 진짜 그네가 매어 있었던 것이다. 그네는 실내 공간의 현대성과 강하게 대비되면서 가슴 뭉클한 추억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음, 여기 그네가 있. 대체 누가, 도대체 어떤 디자이너가 도시 한복판 작은 까페 천정에 그네를 매달 생각을 했다는 말인가. 순간적으로 나는 청마 유치환이 1936년 「조선문학」에 발표한 시 「깃발」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처음 공중에 달 줄 안 그는> 「깃발」이후 80여 년을 훌쩍 넘긴 2020년 2월, 금호강 가 아양교역 1번 출구 앞 코스포폴리탄 시티의 조그만 찻집에서, 나는 그네에 몸을 얹은 채 그의 시를 패러디하고 있었다. 좀 유치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시간을/ 맨처음 천정에 매달 줄 안 그는.>
까페 까르팡의 천정에 매달린 그네가 계기가 되어 나는 최근 두 달 사이에 두 개의 그네를 매었다. 한 개는 경주 남산자락에 주말 농장 비슷하게 마련한 산기슭 늙은 소나무에 매었고, 다른 한 개는 내 고향 영양 죽파 마을 후배 조재영의 집 마당 살구나무 가지에 매었다. 그네를 매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세련된 마닐라 로프를 구할 수 없어서 굵은 나일론 로프로 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로프를 구하는 일, 발판을 구해 구멍을 뚫는 일, 사다리를 걸치고 나무를 타고 오르내리는 일 등 그네를 매는 일 하나하나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지만, 어찌어찌 제대로 매고 맨처음 그네에 올라타는 순간의 황홀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올해 나의 겨울은 세 개의 그네와 함께 지나가고 있다. 대구 한복판 찻집 까페 까르팡의 천정에 매달린 그네와 자작나무숲 자욱한 영양 검마산 기슭 죽파마을의 그네, 장엄히 펼쳐진 금오산(金鷔山) 주능선을 마주 보는 경주 남산의 그네가 그것이다. 특히 지난 1월 중순 경주 남산 기슭에서 그네를 매던 날이 잊혀지지 않는다. 묵조선원 큰스님께 빌린 목재 사다리를 소나무에 걸쳐 놓고 꽁끙거리며 그네를 매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뜻밖에도 시선사 대표 정공량 시인이 시선집을 내자는 것이었다. 나는 오래 미루었던 시선집이 이렇게 나오게 되는구나 하면서 그네에 몸을 얹었다. 그 전화가 계기가 되어 나는 다섯 권의 시집에서 칠십여 편의 시를 골
라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라는 문괘를 단 것이다.
유치환의 「깃발」이 시인의 영감이라면, 까페 까르팡의 「그네」는 이름 모를 한 실내 디자이너의 영감이리라. 나는 그 그네의 줄이 대마의 껍질로 짠 마닐라 로프라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그걸 본 후 나는 그네의 줄은 나일론 줄이나 동아줄과 달리 천연 섬유의 느낌을 주는 마닐라 로프여야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어린이 놀이터나 소공원에 매어 있는 그네의 줄은 하나같이 철로 된 고리로 만들어져 있다.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시간과 비용이 훨씬 더 많이 들더라도 마닐라 로프로 매는 게 정서적으로, 문화적으로 훨씬 더 생산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그 그네를 타는 주인공들이 대부분 우리 사회의 미래 그 자체인 어린이들이기에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지금 내 시의 화두는 그네다. 서정시는 더욱 그네 같아야 할 것 같다. 사람들이 한 편의 좋은 시를 만나 그걸 가슴 속에 그네처럼 매어두는 것. 이따금 그 위에 지치고 고단한 마음을 얹고 천천히 혹은 빨리 타보는 것. 그러므로 지금 나는 <시는 그네다>라는 명제를 가슴에 끌어안고 고요히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어떤 작품이 너의 가슴에 그네가 될 수 있을까 싶다. 이 시집 속에 너의 삶과 인생을 얹고 힘차게 등을 밀어주고 싶은 그네 같은 작품이 한 편쯤, 두 편쯤, 세 편쯤, 에라 욕심을 내자, 열 편쯤 있었으면 참 좋겠다.
뒤늦게 시선집을 내면서, 좋은 그네를 만드는 심정으로 시를 써나가고자 다짐하는 것이다. 그대가 어, 여기 그네가 있네 하면서, 그걸 가슴 속 가장 높은 곳에 비끌어매고 올라타고 싶은, 올라타서는 천천히 움직이고 싶은, 때로는 두 발로 힘껏 구르면서 하늘 높이 차오르고 싶은 그런 시를 써나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시선집을 세상에 내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