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음에 대하여
비가 내리면 풀잎은 비에 젖는다.
바람에 몇 번 몸 뒤척여 온몸을 적시는 풀잎.
이윽고 허리와 발목을 눕혀 그의 뿌리를 적신다.
흙을 끌어안은 뿌리의 힘만큼 풀잎은 자라고
본래 아무런 이념도 없이 세상은 있다.
풀잎의 가파르고 위험한 끝에서
비는 하늘에 이르는 길을 열 것인데,
우산을 타고 내리는 빗물에 둥글게 갇혀
나는 젖지 못 한다.
우산을 접은들 온전히 젖을 수 있으리.
뿌리가 없는 두 발은 슬프고,
큰 상심과 술이 기르는 턱수염만 거칠다.
젖지 못 하는 마음의 끝으로 삼투하는 아픔을 딛고,
그립고 먼 추억이 풀잎처럼 젖으며 온다.
젖은 몸을 거듭 적시는 행복한 강을 버리고,
정직한 신념을 버리고 돌아서면,
빈 가슴에 와서 머무는 바람.
등을 적시는 비에 비로소 등이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