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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Name 너는 붉게 흐른다 · 콘트라베이스 · 술한 잔에 시 한 수로

너는 붉게 흐른다

 

너는 나를 향해, 내 몸을 향해, 내 가슴을 향해, 내 가슴 속을 향해. 그 속의 살을 향해, 속의 살을 지나 붉은 심장을 향해, 심장 속의 심연을 향해, 강한 비바람으로 와서, 젖은 회오리로 와서, 화약 냄새 뒤섞인 폭우로 와서, 순식간에 나를 적시고, 젖은 몸 속을 뜨거운 불의 걸음으로 뚜벅 걸어들어와, 뇌관처럼 위태롭게 헝클어진 줄을 밟고 마구 지나가면서, 희고 붉게 솟구치는 섬광과도 같은, 무수한 꽃송이 폭죽처럼 터트리면서, 비에 젖는, 회오리에 감기는 이 어질머리, 도수 높은 술 같은, 독약 같은, 내 몸 위로, 내 몸 속으로, 거센 폭우로 둥둥 북치며 내려 나를 적시며, 불의 물너울로 붉게 흐르고 있는 너는.

 

**********

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아시지요? 좀머 씨 이야기를 쓴 표정이 좀 멍청한 작가 말입니다. 나는 지금 그의 또 다른 산문 콘트라베이스를 읽고 있습니다. 이건 모노 드라마를 위한 쓸쓸한 대본인데요. 콘트라베이스, 가장 덩치가 큰 현악기, 가장 미세한 소리를 내는 그 악기를 문득 보고 싶습니다. , 건드려보고 싶고, 현에 활을 한 번 대보고 싶고, 속이 텅 빈 그 놈의 몸을 한 번 안아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 글의 앞 부분을 읽어 나가다가 브라암스의 교향곡 2을 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테이프로 사서 차 안에서, 내 차는 94년식 엘란트랍니다만, 차 안에서 듣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요즘 모리스 라벨과 바그너, 그리고 베토벤 순으로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만, 로큰롤이 몸을 도약시키는 것, 아시지요? 라벨은, 특히 볼레로가 그러한데요, 내 마음을 강물로 흘러가게 합니다. 점점 높게, 그러니까 크리 센도로 마음의 한 끝을 주욱 끌어올리는데, 그때 그 부력으로 몸이 붕 떠오르는 것입니다. 나는 브라암스의 교향곡 2, 그 베이스의 낮게 흔들리는 저음에 몸을 기대려 합니다. , , 음악은 비껴가려고 했습니다만, 쥐뿔도 모르면서, 음악의 그물코에 조금씩 체중이 불어나는 몸을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인데요. , 바그너도 몸을 도약시킵니다. 붕붕 떠오르는, 떠올라서는 겨울 쪽으로 흘러가는, 오늘은 가을의, 비에 젖는 시월의 저물 무렵입니다. 콘트라베이스, 그 저음의, 몸집이 큰, 소리 없는 소리를 부둥켜 안고서

 

**************

술한 잔에 시 한 수로

 

방랑 같은 걸 꿈꿀 수 없는 시절을 산다. 밀란 쿤데라 식의 느림은 얼마나 사치인가. 나는 신천대로가 끝나는 팔달교 부근이 꽉 막히기를 기대하면서 차를 몬다. 차가 금호강 느린 흐름보다 더 느리게 움직일 때나는 비로소 강을 굽어본다. 중금속으로 이제 얼음이 얼지 않는 강. 그 위를 걷는 겨울새의 처연함 같은 거거기 노을이라도 비칠라치면, 물결은 어린아이처럼 몸을 움직여 금빛으로 반짝이는 것이다. 차는 느리게 움직이다 한참을 멈추어 선다. 버튼을 눌러 신중현의 새 앨범 김삿갓을 듣는다.

 

<천리길 행장에 남은 일곱 푼을/들주막 석양에 술을 보았으니/어찌하겠는가>,

 

대체 술이며 풍경의 깊이는 어떻게 획득되는가. 락은 신중현의 저항의 방식이며 유효해 보인다. 방법이 있다면 늙음 또한 두려워할 게 아니잖는가. 그러나 세상을 술한 잔에 시 한 수로 건널 수 없음이여, 내 몸 또한 저 물과 같아서, 처음은 순결했으나, 이제 마음의 가장 얕은 바닥조차 비출 수 없게 되었다.

  

김선굉/1952년 경북 영양 청기에서 태어나 1982심상으로 등단했다시집 장주네를 생각함아픈 섬을 거느리고, 밖을 보는 남자」「철학하는 엘리베이트를 출간했다. 2003년 대구시협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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