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붉게 흐른다
너는 나를 향해, 내 몸을 향해, 내 가슴을 향해, 내 가슴 속을 향해. 그 속의 살을 향해, 속의 살을 지나 붉은 심장을 향해, 심장 속의 심연을 향해, 강한 비바람으로 와서, 젖은 회오리로 와서, 화약 냄새 뒤섞인 폭우로 와서, 순식간에 나를 적시고, 젖은 몸 속을 뜨거운 불의 걸음으로 뚜벅 걸어들어와, 뇌관처럼 위태롭게 헝클어진 줄을 밟고 마구 지나가면서, 희고 붉게 솟구치는 섬광과도 같은, 무수한 꽃송이 폭죽처럼 터트리면서, 비에 젖는, 회오리에 감기는 이 어질머리, 도수 높은 술 같은, 독약 같은, 내 몸 위로, 내 몸 속으로, 거센 폭우로 둥둥 북치며 내려 나를 적시며, 불의 물너울로 붉게 흐르고 있는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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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아시지요? 「좀머 씨 이야기」를 쓴 표정이 좀 멍청한 작가 말입니다. 나는 지금 그의 또 다른 산문 「콘트라베이스」를 읽고 있습니다. 이건 모노 드라마를 위한 쓸쓸한 대본인데요. 콘트라베이스, 가장 덩치가 큰 현악기, 가장 미세한 소리를 내는 그 악기를 문득 보고 싶습니다. 툭, 건드려보고 싶고, 현에 활을 한 번 대보고 싶고, 속이 텅 빈 그 놈의 몸을 한 번 안아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 글의 앞 부분을 읽어 나가다가 브라암스의 「교향곡 2번」을 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테이프로 사서 차 안에서, 내 차는 94년식 엘란트랍니다만, 차 안에서 듣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요즘 모리스 라벨과 바그너, 그리고 베토벤 순으로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만, 로큰롤이 몸을 도약시키는 것, 아시지요? 라벨은, 특히 「볼레로」가 그러한데요, 내 마음을 강물로 흘러가게 합니다. 점점 높게, 그러니까 크리 센도로 마음의 한 끝을 주욱 끌어올리는데, 그때 그 부력으로 몸이 붕 떠오르는 것입니다. 나는 브라암스의 「교향곡 2번」, 그 베이스의 낮게 흔들리는 저음에 몸을 기대려 합니다. 음, 음, 음악은 비껴가려고 했습니다만, 쥐뿔도 모르면서, 음악의 그물코에 조금씩 체중이 불어나는 몸을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인데요. 참, 바그너도 몸을 도약시킵니다. 붕붕 떠오르는, 떠올라서는 겨울 쪽으로 흘러가는, 오늘은 가을의, 비에 젖는 시월의 저물 무렵입니다. 콘트라베이스, 그 저음의, 몸집이 큰, 소리 없는 소리를 부둥켜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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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한 잔에 시 한 수로
방랑 같은 걸 꿈꿀 수 없는 시절을 산다. 밀란 쿤데라 식의 느림은 얼마나 사치인가. 나는 신천대로가 끝나는 팔달교 부근이 꽉 막히기를 기대하면서 차를 몬다. 차가 금호강 느린 흐름보다 더 느리게 움직일 때, 나는 비로소 강을 굽어본다. 중금속으로 이제 얼음이 얼지 않는 강. 그 위를 걷는 겨울새의 처연함 같은 거. 거기 노을이라도 비칠라치면, 물결은 어린아이처럼 몸을 움직여 금빛으로 반짝이는 것이다. 차는 느리게 움직이다 한참을 멈추어 선다. 버튼을 눌러 신중현의 새 앨범 「김삿갓』을 듣는다.
<천리길 행장에 남은 일곱 푼을/들주막 석양에 술을 보았으니/어찌하겠는가>,
대체 술이며 풍경의 깊이는 어떻게 획득되는가. 락은 신중현의 저항의 방식이며 유효해 보인다. 방법이 있다면 늙음 또한 두려워할 게 아니잖는가. 그러나 세상을 술한 잔에 시 한 수로 건널 수 없음이여, 내 몸 또한 저 물과 같아서, 처음은 순결했으나, 이제 마음의 가장 얕은 바닥조차 비출 수 없게 되었다.
김선굉/1952년 경북 영양 청기에서 태어나 1982년 「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장주네를 생각함」, 「아픈 섬을 거느리고」, 「밖을 보는 남자」「철학하는 엘리베이트」를 출간했다. 2003년 대구시협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