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강
강은 세속도시의 종말 처리장을 휘감아 돌고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로 가는 먼 길이
길게 흰, 수로를 따라
다급하게 풀린다
용케 추슬러낸 몇 소절 노래도 삭아
더는 흐르지 못할 끈적한 욕망의 진창
또 어떤 격렬함으로 강은 저리 부푸는가
잡풀들의 아랫도리가 툭, 툭 부러지면서
익명의 새떼들만 취수탑 근처를 날고
마침내 뺄물 아래 아득히
혓바닥을 묻는,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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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바람은 넘실넘실 벼논을 먹어간다
이랑이랑 일렁이며 윗배미서 아랫배미로
한 입씩 베어물었다 되뱉느니, 저 금빛!
햇볕은 또 햇볕대로 태금이라도 하려는 듯
종일을 들명나명 체질하는 시늉이다
감흙을 받아낸 봇물도 한결 누긋해지고
하늘에 깔아놓은 새털구름도 그렇지만
이제 더는 애운할 일 잰걸음 칠 일도 없이
짯짯한 인연의 여울터, 물살이나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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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門下
나는 달의 門下다
달은 높이 떠 있으므로
차면 기우나니,
따라잡지 못할 강론
한번도 강림한 적 없으되
늘 내 곁에 가득한 달
진흙 수레를 끌고
홀로 가는 九萬里 長天
오직 달빛만이
가르침의 전부인 것
물 속에 잠겼다고 보는가,
그마저도 中天인 것
초사홀 달이 초나흘 달을 위해
초이레 달이 초여드레 달을 위해
조금씩 베어 먹던
그늘을 남겨 두느니,
건너간 하늘 길섶에
먹물 장삼 한 벌
박기섭/1954년 대구 달성 마비정에서 태어나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다.
시집 「키작은 나귀타고」, 「默言集」 「비단 헝겊」,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 「엮음 愁心歌」 등을 출간하다.
대구문학상, 대구시조문학상, 오늘의 시조문학상, 이호우시조문학상, 중앙시조대상 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