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의 잠 1
맨드라미의 하늘도 시들어
꽃피던 마을은 이제 처참하다
깨어진 자유처럼 풀씨 흩날리고
토종개들의 눈빛은
죽어서도 먼 바다를 머금고 있다
해안을 돌아온 아이들의 귀
재잘거리는 몇 개의 말미잘
잔잔한 어둠이 바다의 허공을 일렁이고
피로한 물풀의 잠아
너는 신의 발목을 안고 몸을 떤다
네 손바닥의 못자국을 뜯어내면
향나무숲으로 파고드는 햇살소리가 들리고
만상의 잠을 보채는 무형의 바람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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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말
양말을 빨아 널어두고
이틀만에 걷었는데 걷다가 보니
웬 풀벌레인지 세상에
겨울 내내 지낼 자기 집을 양말 위에다
지어놓았지 뭡니까
참 생각 없는 벌레입니다
하기사 벌레가 양말 따위를 알 리가 없겠지요
양말이 뭔지 알았다 하더라도
워낙 집짓기가 급해서 이것저것 돌볼 틈이 없었겠지요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양말을 신으려고 무심코 벌레집을 떼어내려다가
작은 집 속에서 깊이 잠든
벌레의 겨울잠이 다칠까 염려되어
나는 내년 봄까지
그 양말을 벽에 고이 걸어두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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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의 일기장
아버님 돌아가신 후
남기신 일기장 한 권을 들고 왔다
모년 모일 ‘終日 本家’
‘종일 본가’ 란
하루 온종일 집에만 계셨다는 이야기다
이 '종일 본가' 가
전체의 팔할이 훨씬 넘는 일기장을 뒤적이며
해 저문 저녁
침침한 눈으로 돋보기를 끼시고
그날도 어제처럼
'종일 본가' 를 쓰셨을
아버님의 고독한 노년을 생각한다
나는 오늘
일부러 '종일 본가' 를 해보며
일기장의 빈칸에 이런 글귀를 채워넣던
아버님의 그 말할 수 없이 적적하시던 심정을
혼자 곰곰이 헤아려보는 것이다
이동순/195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경북대학교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하다.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등단하다.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지금 그리운 사람은」,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 「철조망 조국」. 「꿈에 오신 그대」, 「봄의 설법」, 「기차는 달린다」 등 발간하였다. 신동엽 창작기금, 난고문학상, 시와 시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