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Extra Form
Title Name 마왕의 잠 1 · 양말 · 아버님의 일기장

마왕의 잠 1

 

맨드라미의 하늘도 시들어

꽃피던 마을은 이제 처참하다

깨어진 자유처럼 풀씨 흩날리고

토종개들의 눈빛은

죽어서도 먼 바다를 머금고 있다

해안을 돌아온 아이들의 귀

재잘거리는 몇 개의 말미잘

잔잔한 어둠이 바다의 허공을 일렁이고

피로한 물풀의 잠아

너는 신의 발목을 안고 몸을 떤다

네 손바닥의 못자국을 뜯어내면

향나무숲으로 파고드는 햇살소리가 들리고

만상의 잠을 보채는 무형의 바람이 보였다

 

***

양말

 

양말을 빨아 널어두고

이틀만에 걷었는데 걷다가 보니

웬 풀벌레인지 세상에

겨울 내내 지낼 자기 집을 양말 위에다

지어놓았지 뭡니까

참 생각 없는 벌레입니다

하기사 벌레가 양말 따위를 알 리가 없겠지요

양말이 뭔지 알았다 하더라도

워낙 집짓기가 급해서 이것저것 돌볼 틈이 없었겠지요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양말을 신으려고 무심코 벌레집을 떼어내려다가

작은 집 속에서 깊이 잠든

벌레의 겨울잠이 다칠까 염려되어

나는 내년 봄까지

그 양말을 벽에 고이 걸어두기로 했습니다

 

***********

아버님의 일기장

 

아버님 돌아가신 후

남기신 일기장 한 권을 들고 왔다

모년 모일 終日 本家

종일 본가

하루 온종일 집에만 계셨다는 이야기다

'종일 본가'

전체의 팔할이 훨씬 넘는 일기장을 뒤적이며

해 저문 저녁

침침한 눈으로 돋보기를 끼시고

그날도 어제처럼

'종일 본가' 를 쓰셨을

아버님의 고독한 노년을 생각한다

나는 오늘

일부러 '종일 본가' 를 해보며

일기장의 빈칸에 이런 글귀를 채워넣던

아버님의 그 말할 수 없이 적적하시던 심정을

혼자 곰곰이 헤아려보는 것이다

 

이동순/195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경북대학교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하다. 1973<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등단하다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지금 그리운 사람은,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 철조망 조국꿈에 오신 그대봄의 설법기차는 달린다 등 발간하였다. 신동엽 창작기금, 난고문학상, 시와 시학상을 받았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Title Name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8 | 이하석 | 책 머리에 file 오리들이 물에서 시를 놀고 있네 관리자 2020.08.17 3
27 차 례 관리자 2020.08.17 3
26 | 김선굉 편 | 너는 붉게 흐른다 · 콘트라베이스 · 술한 잔에 시 한 수로 관리자 2020.08.17 5
25 | 김세진 편 | 방울실잠자리 · 새벽, 숲에 들다 · 그림자의 길 관리자 2020.08.17 4
24 | 김호진 편 | 스좌좡 가는 길 · 寧國寺에서 · 나는 이미 탑이다 관리자 2020.08.17 3
23 | 문무학 편 | 잠-코의 시간 · 달과 늪 · 비비추에 관한 연상 관리자 2020.08.17 4
22 | 문인수 편 | 각축 ·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 쉬 관리자 2020.08.17 4
21 | 문형렬 편 | 언제나 갈 수 있는 곳 · 봄꿈 · 꿈에 보는 暴雪 관리자 2020.08.17 5
20 | 박기섭 편 | 그리운, 강 · 시월 · 달의 門下 관리자 2020.08.17 3
19 | 박진형 편 | 저녁밥처럼 · 새가 되고 싶은 나 · 몸나무의 추억 관리자 2020.08.17 4
18 | 서담 편 | 양수리-여의도, 차창 밖의 시퀀스 5 · 때론 폭주족이고 싶다 · 환생 관리자 2020.08.17 3
17 | 서대현 편 | 아내考 7 · 유리벽 속 거미줄 · 그림자 6 관리자 2020.08.17 4
16 | 송재학 편 |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 흰뺨검둥오리 · 닭, 극채색 볏 관리자 2020.08.17 4
15 | 엄원태 편 | 굴뚝들 · 북녘들 산업도로 · 나무는 왜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는가 관리자 2020.08.17 5
14 | 윤일현 편 | 어머니와 소풍 · 장마철 · 김천댁 관리자 2020.08.17 4
13 | 이동백 편 | 살레 지나 운문사 가는 길 · 어라연 · 靑山島 관리자 2020.08.17 4
» | 이동순 편 | 마왕의 잠 1 · 양말 · 아버님의 일기장 관리자 2020.08.17 6
11 | 이무열 편 | '사이' 라는 말 · 겨울나기 · 어떤 흐린 날 관리자 2020.08.17 4
10 | 이유환 편 | 낙타 · 감자꽃 · 용지봉 뻐꾸기 관리자 2020.08.17 3
9 | 이정환 편 | 千年 · 獻詞 · 別辭 관리자 2020.08.17 4
8 | 이종문 편 | 봄날도 환한 봄날 · 눈 · 선풍 관리자 2020.08.17 3
7 | 이하석 편 | 투명한 속 · 초록의 길 · 늪 관리자 2020.08.17 5
6 | 장옥관 편 | 달의 뒤편 · 눈꺼풀 · 입술 관리자 2020.08.17 4
5 | 장하빈 편 | 밥통 · 개밥바라기 추억 · 어머니 관리자 2020.08.17 3
4 | 조기현 편 | 매화도 1 · 아침 연못 · 암곡 오동꽃 관리자 2020.08.17 3
3 | 김양헌 편 | 1990년대 시읽기의 방법적 시론 불상유통(不相流通)/동기감응(同氣感應 ) 관리자 2020.08.17 6
2 | 박진형 | 책 뒤에 시오리 20년의 알리바이 관리자 2020.08.17 4
1 만 / 인 / 시 / 인/ 선 만 / 인 / 시 / 인/ 선 관리자 2020.08.17 4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