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레 지나 운문사 가는 길
굽은 길이 마음을 편다면
운문사 가는 길 잡겠네
가난한 물줄기들
골짝마다 떠나와
잔기침 한 번 없이 내를 이뤄 모여드네
서툰 종이학 접듯 산허리 눌러 오르면
벽에 갇힌 물줄기
피멍든 수면 이루겠네
그 위로 달이 뜨고 별이 지고
산세상 어우러지는지
막힌 길을 흐름으로, 흐름을 다시 막아
산문이 보인다면
산 아랫마을쯤 서성이겠네
밤마다 물을 거르는 체소리 열리고
떠나간 발자국 벗어놓은 모래알
달빛처럼 쌓이겠네
성 (聖)도 속(俗)도 모르면서
경계의 그늘에 앉아
법고 소리에 숨을 죄겠네
굽은 마음 어디에도 눕힐 수 없다면
귀를 숙여 더부살이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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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연
길이란 길 죄다 얼어붙어 그대에게 끓었던가
진눈깨비 오래도록 나를 위해 내렸던가
철없는 세상 잠들면 눈은 다시 내리고
동강 맑은 물 흐르는 술병 속 밤새 뒤척인다
젖은 신발끈 풀린 어느 바람 매운 날
가랑잎처럼 쓸리다 다시 만날까
세상의 모든 길 죄다 녹아 발걸음 글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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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山島
길은 무덤에서 끝나 있다 집을 떠난 새들이 바람 속에 길 없는 길을 물을 때 물오리나무에서 죽비 소리가 쏟아진다. 늙은 상수리나무 손가락 사이로 얼핏 보이는 강물 세상에서 미처 이름을 얻지 못하고 내 속에서 흩어진 글자들 답답한 듯 돌아눕는다. 물소리가 깊어지는 밤이면 산이 가끔 내려와 못다 푼 수수께끼를 푼다. 이제 그만 내려가라고 몸을 턴다. 산도 강도 오래 누우면 따스한 무덤이라고 나는 바람 속에 집을 세우고 돌아눕는다.
이동백/1955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다.
1996년 「현대시」로 등단하고, 시집 「수평선에 입맞추다」를 출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