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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Name 투명한 속 · 초록의 길 · 늪

투명한 속

 

유리 부스러기 속으로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 어려온다. 먼지와 녹물로

얼룩진 땅, 쇳조각들 숨은 채 더러는 이리저리 굴러 다닐 때,

 

버려진 아무 것도 더 이상 켕기지 않을 때.

유리 부스러기 흙 속에 깃들여 더욱 투명해지고

더 많은 것들 제 속에 품어 비출 때,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확실히 비쳐온다.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

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

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

비쳐들어간다. 비로소 쇳조각들까지

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며,

 

************ 

초록의 길

 

때때로 가벼운 주검이

아주 가까운 데서 만져지는 수가 있다.

11월의 오후, 차고 마른 풀잎들이 모여 있는

도시 변두리 또는 도심의 공터의

푸른 빛이 먼지와 함께 흩어지는 곳에서.

 

방아깨비 한 마리를 내가 사는 아파트의 빈터에서 서성대다 발견했다. 아이들의 노래소리 가까이 그 주검은 아무도 몰래 버려져 있었다. 바랭이풀들의 마른잎 사이에서 서걱이는 것을, 처음에 나는 빈터 멀리서 날아온 은사시나무 가로수의 마른 잎인 줄 알았다. 그것은 속날개였다. 바깥을 덮었던 초록 외피의 튼튼한 겉날개는 떨어져 나가고, 속날개는 끝이 찢긴 채 몸체에 겨우 붙어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렀다. 흡사 죽어간 방아개비의 몸을 떠나, 방아개비의 초록 영혼을 이 도시의 하늘 위로 날리려는 것처럼. 통통했던, 미세한 물결무늬로 마디를 이루었던 배는 벌레에게 뜯겨 나가 속이 비어 있었다. 머리 역시 반 쯤 뜯겨나가, 속이 비어 있었다. 껍질 뿐인 몸으로 바람에 조금씩 날개 파닥이며 닮아갔다. 우리가 사는 도시의 밑바닥에는 칼날의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댔다. 나는 풀밭을 계속 걸어다녔다. 잠시 후 풀섶 아래서 풀무치의 주검을 보았다. 이어서 여치와 잠자리의 주검들을 보았다. 그러나 이 주검들 앞에서 애통해 할 까닭은 없다.

 

가난하게 떨어져 땅에 눕는

내 시간의 따스한 집이여 주검이여

살아 있던 날들의 모든 기억을 고마워하며

우리 함께 여기에 눕느니

내 존재의 끝이자 시작인 너의 가슴에

지금 고요히 누워 있으니.

 

풀무치와 방아개비, 여치, 잠자리들은 그들의 빛나는 날개로 여름을 분주히 날았고, 어쩌다 이곳까지 왔었고, 죽을 때가 되어서 죽은 것이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이 아파트의 가까운 이웃이 죽었을때, 애통해하는 가족들의 울음 속으로 여치 울음이 끊임없이 들렸음을 나는 슬퍼 한다. 죽은 이는 밧줄에 묶여 지상에 내려가 장의차를 타고 도심을 빠져나갔다. 이 도시와 산을 눈물로 이은 길을 만들면서. 또 나는. 사랑하는 이를 그릴 때 풀벌레의 울음을 끊임없이 들어야 하는 길고 고적한 밤도 보냈다. 내가 발견한 풀벌레의 주검들은 그 때 내 영혼을 흔들던 그것들이었으리라. 지금은 모든 풀벌레 소리도 끊기고, 밤은 너무나 고요하다. 모든 풀벌레들의 울음은 죽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 하나 하나가 온 길을 비로소 찾아 나설

마음이 인다. 풀무치는 초록의 길을 따라, 산이나 들에서 이 도시의 깊은 곳으로 왔다. 처음엔 들판에서 쉽게 이어진 초록의 길이 도시 변두리의 빈터로 이어졌으리라. 그 다음엔 우리가 모르는 풀에서 풀로 이어진 길이 풀무치를 미세하게 이끌었으리라. 그렇다. 이 도심의 회색 콘크리트의 세계에도 자세히 보면--풀무치의 눈으로 보면--들과 산으로 이어진 초록의 길이 있다. 아무도 찾으려 하지 않는 그런 신비한 길이. 단순하게 자연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우리 삶 속에는 그렇게 열린 길이 있다.

 

*** 

-포산일기 6

 

생각의 수면도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둡다

밑바닥에는 우렁이 기어간 길들이 여러 갈래로 나있다

어구를 챙기며 어부가 물 속을 들여다보면

수면을 거대한 잎들로 덮고도 사려깊게 내다보는

늪의 푸른 눈

 

제 안의 꽃을 내헤쳐 보이고 싶은 늪은

어부 앞에서 망설인다

가시연마저 온몸의 가시로 제 몸을 찢고

수줍음을 불빛처럼 켜낸다

제 안에 있는 힘이 끊임없이

밑바닥을 차고 올라와서 펴는 생의

說明이 왜 저러 할까

가시연의 거대한 바퀴를 돌리며

어부 김씨는 잠깐 뱃길을 낸다

그 길 따라 그 만이 아는 깊이까지

높은 제 속을 툭툭 열어제켰다가

어부의 꿈이 걸어내려간 우렁이의 길까지

여전히 제 힘으로 꼭꼭, 다시 여민다

 

이하석/1948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197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다시집 투명한 속, 김씨의 옆얼굴우리 낯선 사람들」, 측백나무 울타리금요일엔 먼데를 본다. 」, 고령을 그리다. 것들등을 출간하였고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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