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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Name 어머니와 소풍 · 장마철 · 김천댁

어머니와 소풍

- 낙동강 4

 

진작에 귀띔이나 하였으면

뒷집 청송댁에서

쌀 한 되는 꿨을 텐데 ······

 

닭들만 퍼덕이는 이른 새벽

죽 끓이다 홀로 마당에 서서

소풍 간다는 말 차마 못해

전날 밤 자기 전에서야 말을 꺼낸

어린 나의 조숙함을 안쓰러워하며

흐르는 눈물 훔치며 하늘을 볼 때

쌀알 같이 촘촘한 새벽 별들은

메말라 평지가 된 당신의 젖가슴에

총알처럼 비수처럼 내려와 박히고

당신을 서럽게 서럽게 우셨습니다

 

끓는 죽에서 쌀알 건져

숯불에 졸여 밥처럼 만들어

백철 도시락에 꼭꼭 눌러 담고

고구마 두 개, 감 세개

밤늦게 마련한 말표 사이다 한 병

보자기에 싸는 당신의 눈에선

피보다 진한 눈물 한없이 흘러내려

앞마당에 붉게 핀 맨드라미

더욱 검붉게 물들였습니다

 

삽짝문 나서는 철부지에게

십원짜리 하나 꼭 쥐어주며

잘 놀다 오너라 나직이 당부할 때

뒷마루 밑 복실이도 쪼르르 뛰어나와

어머니 치마 물고 꼬리치며 까불대고

붉게 물든 앞산이 치맛자락 날리며

너울너울 춤추며 우리집으로 내려와서

나의 손을 꼬옥 잡고 어서 데려 갔습니다

 

강굽이 내려다보이는 검단동 산마루

보물찾기 노래자랑 정신없이 놀다가

소풍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야바위꾼

빙빙 도는 나무원판 위 닭털 달린 작은 화살로

일원 주고 꽂아보고 일 원 주고 또 꽃아보고

한 푼도 남김없이 십원다 날려도

그 날은 그렇게도 즐거웠습니다

 

저물도록 놀다가 돌아오는 방천길

저 멀리 뚝다리 위에서 나를 기다리며

노을에 젖어있던 당신의 모습

강물과 함께 세월은 홀러가도

당신의 모습 당신의 눈물

내 가슴 속 언제까지 남아 있을 겁니다

 

*****

장마철

-낙동강 6

 

밤새 퍼부은 비로

학교 앞 샛강 넘치는 날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결석으로 처리되지 않았다

그런 날은

누나를 졸라서

사카린물 풀어먹인

밀이나 콩 볶아

어금니 아프도록 씹으며

주룩주룩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거나

배깔고 엎디어 만화책을 볼 때면

눅눅하고 답답한 여름장마도

철부지 우리에겐 즐겁기만 했고

아버지 수심에 찬 주름진 얼굴도

돌아서면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

형과 나는 은밀한 눈빛으로

내일도 모레도 계속 비가 내려

우리집만 떠내려 가지 말고

샛강물은 줄지 않기를

낄낄거리며 속삭이곤 했다

 

어른이 된 지금도

간절히 쉬고 싶을 때는

샛강 넘치는 꿈을 꾼다

 

 

*****

김천댁

-낙동강 10

 

달비 장사에게 머리카락 팔아

식구들 겨울내복 사 오겠다며

머리 곱게 감아 빗고 장에 간

심성 곱기로 온 마을에 칭찬 자자한

나무꾼의 아내 김천댁은

해 지고 밤이 깊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서서

사흘밤 사흘낮을 꼬박 찾았으나

행방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닷새째 되는 날 김천댁은

남편 박서방이 나무하러 가는 길목

마을 뒷산 어느 큰 소나무에

치마끈으로 목 맨 시체로 발견되었다

뒷머리 몽땅하게 다 잘렸고

찢어진 꼬장주 가랭이에는

붉은 선혈이 얼룩져 있었다

혹심을 품은 못된 달비 장사에게

머리칼 잘리고 겁탈도 당하고는

서럽게 산 이 세상을 그렇게 떠났다

세 살짜리 봉식이와 박서방의 내복을

보자기에 정갈하게 싸서 발 아래 두고서

 

윤일현/대구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다.

사람의 문학과 시집 낙동강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교육평론집 불혹의 아이들등 출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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