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Extra Form
Title Name 불상유통(不相流通)/동기감응(同氣感應 )

 불상유통(不相流通)/동기감응(同氣感應 )

 

-1990년대 시읽기의 방법적 시론

 

 

1. 방정식을 만나다

 

폭설이 내린 어느 오후였다. 우리는 참다람쥐 먹이를 주러 나왔다가 만났다. 그는 12,302그루의 나무와 함께 살았는데, 나무처럼 항상 말없이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울타리 너머는 도로와 아파트 지대여서 날아드는 새들과 참다람쥐 몇 식구 외에는 별다른 말 벗도 없었다. 그날 그는 무슨 방정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에 나는, 그가 생물학을 전공하고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갔으므로 그런 이야기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시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가 문학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는 건 전혀 뜻밖이었다. 게다가 문학을 방정식으로 설명하려 했으니, 만약, 텍스트가 지닌 정서와 사상의 총합을 산출할 수 있는 방정식을 찾는다면, 각 시편들이 지닌 가치를 규정하는 일은 아주 쉬워질 것이라고 했다. 자연과학자다운 발상이지만, 다른 별에서 온 어린 왕자의 얘기처럼 들려서 그저 웃고만 있는데, 그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물리학이 E=mc'이라는 아인슈타인의 간명한 방정식 하나로 물질의 에너지와 시공간의 휘어짐을 밝혔고, 별과 은하들이 서로의 거리에 정비례하여 모든 방향으로 멀어지고 있다는 허불의 법칙으로 150억 년을 거슬러 빅뱅에 이르는 과정을 도출하였듯이, 구체적인 상황을 포괄하면서 전체와 근원을 통찰할 수 있는 정서역학적 방정식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서역학이라니! 너무나 가당찮은 생각이었지만, 생물학적 방법론에 토대를 둔 갈래 이론에서 볼 수 있듯이, 문학 연구와 비평은 철학이나 사회학뿐 아니라 자연과학의 방법론과도 영향을 주고받은 것이 사실인데다 물리학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으니 나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아이작 뉴턴의 고전역학에서 일리야프리고진의 비평형 열역학에 이르는 몰리학의 역사를 문학적 상상력의 수학적 실현 과정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역으로 수학적/물리학적 논리가 문학적 상상력의 근거를 밝히는 토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는 문학을 자연과학적으로 표현한 최초의 인물로 프랑스의 비평가 떼느를 꼽았다:방정식을 만들고 수학적으로 증명하지는 않았지만, 떼느는 종족(race), 환경(milieu=social environment), 시대(moment)를 문학의 주요 변인으로 잡았지요. 변인이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것이 함수를 만들지요. 만약 떼느가 방정식을 세웠다면, L=r+e+m이 아니라 L=rem으로 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문화적 전통을 의미하는 종족은 사회적 환경과 역사적 상황에 덧붙는 무엇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환경 e는 공간변수로 시간 변수인 시대 m과 길항하며 변화하는 창작상의 시공간, 즉 역사적 현실이 되겠지요. 이것이 문학적 변용을 거쳐 작품에 투사되는 양을 h(historicolreality)라 합시다. 전통은 역사적 현실에 포함될 수 있고, 오늘날은 그것을 수용하는 시인의 역량과 개성이 중요하므로 rp(personality)로 대체할 수 있겠죠. 그러면 방정식은 보다 간명하게 L=ahp (a는 상수:hp를 제외한 요소들은 변인이 없거나 상대적으로 아주 적다고 보고 고정함)로 바꿀 수 있지요. 다른 요소들을 상수로 볼 때, 개별 작품(poem)은 이미지와 의미가 상호작용하는 Po= aim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집합적/추상적 의미로서의 시(poetry)P=P1+P2+P3++Pn , P=EP,로 나타낼 수 있고요. 시의 정서적 에너지는 개별 작품들의 에너지의 총합과 같다는 단순한 의미를 담은 수식입니다. 이런 소박한 함수가 어디 쓰일 것 같지 않지만, 수학/물리학은 원래 가장 단순한 정리 (定理)에서 출발하지요.

 

그는 몇 개의 방정식을 더 이야기했고, 의식을 가진 생명체/시인이 생산하는 자의적 텍스트와, 물리적 역학관계로만 존재하는 우주/물질이라는 텍스트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하면서, 측정 자체의 어려움도 문제지만 이미지/의미/리듬/독창성/정서의 양을 나타낼 수 있는 단위가 아무 것도 없다며 한숨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정서역학적 방정식이 굳이 어떤 것을 계산해내기보다 변수 간의 관련성을 나타내기만 해도 상당한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기왕의 이론적 틀을 활용하여 문학적 위상 공간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초적인 몇 개의 방정식을 설정한 것이다. 심리적 뒤엉킴에서 발현하는 시편들의 정서적 방향과 무게를 최대한의 객관성을 요구하는 방정식으로 기술하는 것은 곧바로 파탄에 이르는 길처럼 보이지만, 동시대 문학의 전반적인 경향이나 문학사를 이해하는 데는 세부적인 사항을 어느 정도 무시하고 보다 추상적인 보편성을 추출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런 방법도 유용한 측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 것.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같은 방대한 작업도 따지고 보면, 사실주의와 반사실주의의 상호작용이라는 간명한 기술 방법을 토대로 모든 예술적 경향을 공시적/통시적으로 조망하고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다람쥐는 보이지 않고 새들만 몰려와 먹이를 쪼아먹었으므로 우리는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히말라야시다에서 눈이 풀썩, 떨어진다. 다람쥐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표지다. 그의 눈이 참다람쥐를 쫓아가는 동안 내가 물었다. 문학이 현실과 시인의 인식 태도, 여러 가지 언어적 요소, 정서적 정황 등에 따라 다르게 생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굳이 방정식이 필요할것 같지 않았다. L=ahp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일까? 그가 말한다: 만약 일정한 공간과 한정된 시간안의 문학의 총 에너지를 계산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 값이 얼마든 간에 일정한 수치로 고정이 됩니다. L의 값이 일정하다면, 두 개의 변수 hp는 반비례하게 되지요. , 현실의 무게가 커지면 시인의 개성은 줄어들고, 시인의 독창성이 강해지면 사실성은 약해지거나 왜곡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은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차원, 즉 현실이 시적으로 변용하는 성격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현실은 직접적으로 문면에 나타날 수도 있고, 간접적인 형태로 왜곡되거나 화해와 초월의 방식으로 녹아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정확한 측정과 객관적인 경계 긋기는 어렵겠지만, 상대적인 차별화는 가능할 겁니다.

 

가령, 1980년대 한국사회라는 특정한 시공간의 문학을 생각해봅시다. 두 가지 중요한 시적 경향이 있었지요. 하나는 민중시 Pr, 다른 하나는 해체시 Pn이라고 부릅시다. 민중시는 현실을 직접적으로 수용하는 양식이지요. 노동해방/분단극복이라는 현실적 문제가 시적 현실로 전이되면서 훨씬 더 예각화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적과 아를 확연히 갈라내어 묶"는 동시에 "전선에 선 동지들을 한 대오로 묶" (박노해, 머리띠를 묶으며)는 민중시는 현실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보여주는데, 하나는 적대적 현실이 주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금/여기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과 인정이며, 다른 하나는 그러한 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단절과 부정입니다이런 경우, ' 이 되기로 결심하지 않는 한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겠지요. "군화발과 최루탄, 피비린내나는 강제진압" (노동자공동창작시, 그러나 끝내 우리는)에 저항하며,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설 수는 없다" (백무산,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고 노래하는 와중에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겠습니까? 물론 시인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그것마저 없다면 굳이 시인의 이름을 밝힐 이유가 없겠죠.), 그것은 집단성을 드러내는 방법상의 차이일 뿐이지요. 집단적 현실을 중시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L= ahp에서 h는 무한대로 치닫고 p는 영으로 수렴되는 이런 상황을 뒷받침하기 위해 창작주체론, 집단창작론, 장르확산론 등의 이론을 도입하고 현실화하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이론의 틀을 그대로 뒤따라간 홍희담의 소설깃발의 한 부분을 보면 보다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그녀들은 작은 책자를 만들었다. 시도 있었고.,수기, 고향으로 보내는 편지, 수필 등등이 실렸다. 형자의 의견으로 이름을 모두 떼었다"이름을 떼고 읽어봐. 모두가 우리들 글 같잖아." 정말 그랬다. 모두 각자가 쓴 것 같았다. 하나하나 읽을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데 전체적으로 읽고 나면 치밀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개인의 불만들이 합쳐져서 집단의 분노가 표현되었다. --창작과비평, 복간 제1, 1988.

 

현실의 모든 세목들은 노동해방/분단극복이라는 강력한 하나의 현실로 응축되기 때문에 민중시의 시인들의 당파성을 벗어나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다거나, 시적 새로움은 미시적 국면에서 가까스로 유지될 뿐이었다는 결론은 이미 밝혀진 바와 비슷하지만, 그것을 방정식으로 나타내자 이상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현실이 강하게 표현될수록 상대적으로 시인의 개성은 약해진다는 것. 정말 현실이 직접적으로 투사되는 강도와 시인의 개성은 반비례하는 것일까?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현실과 시인의 정서는 상호 상승작용을 한다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박노해나 백무산의 시가 집단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개성 없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는 해체시도 같은 방정식에 대입했다. 그러나 현실의 성격을 다르게 해석하였다. 해체시는 응축되는 현실이 아니라 확산되는 현실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묘한 깊이와 전방위적 넓이를 지니고 있어서 시인이 만날 수 있는 현실은 언제나 한 조각 파편에 불과하다. "타이어 조각들과/못들, 유리 부스러기와 페인트 껍질들" (이하석, 폐차장) 같은, 문명이 쏟아내는 광물질의 파편들이 시의 출발점이다. 그 무수한 파편들이 뿜어내는 "인류의 엔트로피적 발광" (주종환, 백화점 왕국)의 본질을 보여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시인은 그것이 소용없는 일임을 이미 알고 있다. 자본의 논리, 자본의 세계제국은 관념적으로 이해한다고 달라질 무엇이 아닌 것. 응축되는 현실은 무게중심이 있지만, 확산되는 현실은 제어할 수단이 없는 것. 결과적으로 드러난 모든 시적 현실은 절망/허무의 그림자일 뿐이며, 괴물 같은 현실을 조롱하고 야유하며 쳐부수기 위해 직조된 거짓 현실일 따름이다. 현실은 극심하게 뒤틀리고 고의적으로 왜곡된다. 민중시에서 처럼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객관적/절대적 현실이 아니라, 내부에서 주관적으로 변형한 것만이 시적 현실로 존재한다. 한 마디로 그것은 헛것이다. 시적 주체의 욕망과 자학, 허무와 절망으로 뭉쳐진 허구가 끝없이 허공으로 확산되어 간다. 그 헛것으로 자본의 벽에 온몸을 부딪쳐 보지만, 좌절은 이미 예정된 일, 절망의 무게가 커질수록 현실은 더 철저히 부숴져야 하고, 그 방법적 전략으로 끊임없는 새로움의 추구가 선택된다. 그리하여 시인의 개성이 현실을 압도해버린다. 황지우 박남철, 김영승이 그 극단을 보여주는데, 그들은 서로 간에도 전혀 같지 않다. 서로 새롭다. 이질성으로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이들의 동질성인 셈이다.

 

하지만, 현실을 극단적으로 변용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약해지거나 사라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일부 작품들은 현실과는 전혀 다른 가상 공간, 순수한 상상의 시 공간을 설정하거나 자연과 유년으로 떠나기도 하지만그것은 현실을 보다 핍진하게 드러내기 위한 방법적 전략이고, 독자도 현대인의 절망적 상황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어쨌든 그는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나뭇가지를 주워 눈 위에다 세 개의 방정식을 썼다. Pr= ahi-Pi - 와 Pm = ahi-oPi - -∞, P1 = aho+i∞-i 가 그것이다. 응축되는 현실의 중력이 무한대로 커지고 확산되는 현실이 시적으로 무화하는, 앞의 두 방정식은 보았던 바와 같다. 그런데, 세번째 방정식은 뭡니까? 그건 전통적 서정시의 역학입니다. 0으로 수렴되거나 0로 확산되지 않고 일정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뜻이죠. 하지만, 해체시가 비관적 세계인식과 그로테스크한 일탈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현실과의 치열한 싸움터에 있었다고 본다면, 전통적 서정시가 오히려 삶의 현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게다가 전통적 서정시도 현실과 밀착하는 경우가 있고 초월해버리는 작품이 있지요. 그런데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라, 한 작품에서 시적 현실이 거의 움직임이 없는, 어느 한 쪽으로 수렴/확산되는 과정이 아니라 시인에 의해 일정하게 고정된 형태를 띤 다는 점입니다.

 

황조가이래 이땅의 서정시는 대체로 제한된 시공간의 인간을 보여주었죠. 옛시가들을 보면 이러한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황조가도 그렇고 구지가, 현화가, 처용가등 대부분 옛시가들이 특정한 사건/정황을 설화의 형태로 거느리고 그 안에서 비로소 일차적 해석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하여가단심가, 한우와 임제의 시조들에서 서정적 자아가 연출하는 특수한 국면을 제외한다면 훨씬 빈약한 텍스트가 되겠지요. 현대시는 대부분 창작상의 과정이 드러나지 않아서 (감추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고) 감지하기가 어려울 뿐 근본적인 원리는 마찬가지 아닐까요?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하고 외쳐보지만 현실은 "뭍같이 까딱" (유치환, 그리움)도 않고 서정적 자아의 별리도 어김없이 지속됩니다. 전통적 서정시는 이렇게 변하지 않는 특정한 개별적 상황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을 인간의 보편적 정서로 읽는 것은 이후의 해석상 문제지요.

 

반면, 민중시와 해체시의 현실은 개인의 심리적/정서적 공간과 상관없이 선험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특정한 정황을 가져 오더라도 당대의 집단적/보편적 특성이 앞서서 개재하고, 더구나 변화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요. 민중시에서 자아는 도덕적/사회적으로 정의로운 양심이기 때문에 변해야 할 것은 세계/현실이고, 해체시에서는 현실과 자아가 다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둘 다 극복의 대상이지요, 그것이 불가능한 게 탈이지만. 그러나, 전통적 서정시에서 현실의 변화는 자아를 통해서, 자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현실은 고정되어 있으니 변해야 할 것은 자아밖에 없지요. 흔히 말하는 '세계의 자아화' 란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만약, 세계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면, 안 그래도 힘없는 자아가 쫓아가면서까지 붙들어 자아화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전통적 서정시에서는 서정적 자아가 처음부터 현실의 범위를 특수한 국면에 제한하면서 고정된 형태로 묶어놓고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울든 웃든 자아가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습니까?

   

2. 불상유통(不相流通)의 시대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날씨는 따뜻했고 눈은 녹아. 참다람쥐 식구들은 히말라야시다와 잣나무 씨앗을 먹으며 겨울을 지낼 것이다. 나는 방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의 방정식을 정리하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것이 수학적 해의 추구가 아니고 문학적 관계망의 표현이라면, 1990년대엔 어떤 방정식이 가능할까? 아마도 그라면 두번째 방정식Pm= ahi-oPi-∞ 만으로 이 시대를 해석하려 할지 모르겠다. 그것은 "詩가 꿈꿀/고향은 없다. 자연조차 없다./···/자본의 가속도에 브레이크 걸어줄 민중도 없다" (서림, 오존주의보가 내려도-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1)는 현실적 변화에 부함할 뿐 아니라, 1990년대 시의 몇 가지 주요 특징, "20세기말의 핏빛 일몰" (박남철, 자본에 살어리랏다)에서 흘러드는 비관적 세계관, 새로움에 대한 끝없는 갈증, 방법적 차별화에서 기인하는 소통불능을 내포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다양성의 근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방정식에 따르면. 1990년대의 다양성은 현실이 시적 변용과정에서 격심하게 뒤틀리고 주체의 인식이 예각화하는 데 따른 필연적인 결과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1980년대 시의 핵심은 단절과 열정이었다. 부당한 시대와의 단절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려는 열망, 그것이 1980년대를 '시의 시대' 로 이끈 동력이 아닐까. 그래서 1980년대가 끝나자 시인은 "만장에 박수갈채 날아오르던/열창의 시대는 갔다" (김정환,미를 )며 한 시대의 종언을 선포한 것, 민중시든 해체시든 시대와의 투쟁, 기성 현실과의 전면전이라는 당대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둘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현실인식의 태도와 문체의 성격에 근거를 둔 종개념에서의 단절이다. 그 아래로 다시 민중시는 내용에 따라, 해체시는 표현 기법에 따라 하위 개념의 분파를 거느린다. 1980년대에는 이렇게 체계적인 단절이 있었고, 단절의 거리에 비례하여 긴장도도 증가하였다. 긴장은 열정을 낳고, 열정은 다시 단절을 강화하였다. 단절이란 곧 자기 확립의 표지였던 것. 세종대왕이 "異乎中國 不相流通" 을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부정적 현실에 대한 인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단절의 의지를 강화하며 우리 것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일이었다. 새로운 세계는 부당한 기존의 현실과 단절하는 데서 비로소 배태하는 것.

  

내가 1990년대 시를 그와 다르게 보는 지점은 바로 단절의 성격에 있다. 1980년대의 단절에는 체계가 있었지만, 1990년대의 단절은 다양한 층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높낮이와 경계를 가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민중시와 해체시의 역할이 약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1990년대가 전통적 서정시의 후손들로 들끓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경향들이 복잡하게 뒤얽히면서 내면화하였다. 그래서 민중시의 입장에 가까운 "씨레기 잡탕" (최영철,소재유감)론이 나오고, 해체적 경향의 "비빔밥 시론" (이승훈, 나는 사랑한다)도 등장한다. 1980년대에는 시에 이르는 길이 3차원적 공간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1990년대에는 그것이 다차원적 시공간으로 확대된 셈이다. 정신주의, 우주공동체. 욕망과 일상성, (新)리얼리즘, 포스트 모더니즘, 페미니즘, 문명비판. 생태주의, 메타성과 패러디, 통신문학, 하이퍼텍스트 등 대립항도 아니고 같은 차원에 놓일 수도 없는 논리들이 겹쳐지고 밀어내는 자리가 1990년대다. 이것은 시에 이르는 방법론이 열린 체계가 아니라, 한 작품을 읽는 방법으로 다른 작품에는 이를 수 없는, 소통불능의 닫힌 체계임을 의미한다. 손에 뻔히 잡힐 듯한 이 시대를 온전히 포괄하여 해석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이론의 그물코에 걸리는 시편보다 빠져나가는 작품들이 훨씬 많은 때문이다. 내가 처음부터 방정식 같은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긴 까닭도 이런 데 있다. 1990년대 시를 구성하는 변수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많고, 그 위상의 차별화도 가능할 것 같지 않다. 그러니 방정식을 세우고 거시적으로 유형화하여 이 시대를 읽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을 터. 미로는 미로로 읽자. 그것이 오히려 예상치 못한 높은 생산성을 기록할지도 모른다.

 

시인의 절대수가 증가하였다는 것도 문제가 될까? 1990년대에 4개 출판사에서 간행한 시집만도 300권이 넘는다. 양적으로 이미 비평의 한계가 규정될 수밖에 없는 숫자다. 물론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시인/시집의 존재 근거는 독창성이다. 그것이 없으면 시의 왕국에서 추방되거나 아류로 낙인이 찍히는것은 당연하고도 자명한 일. 각 시편들은 존재 이유를 마련하기 위해 끝없이 새로움을 찾아나서야 한다. 그러나, 1980년대 민중시의 강렬함을, 해체시의 격정을 넘어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죽음에게 봉헌된" (남진우, ) 시는 드물게 오는 법. 시라는 "이 미친사랑의 제단"에 스스로를 눕히고 "숨죽인 영혼의 떨림판을 뒤흔들어주" (윤효, 프로포즈)길 기다리는 동안, 어느새 "시간은 염통처럼 썩어간다" (박정대, 물질적 황홀 2-그 눈동자). 새로움은 점차 고갈되고 시인들은 보다 미세한 부분까지 파고든다. 그러다보니 이제 시가 현실과 길항하는 문제는 오히려 부수적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어느 시대든 한 편의 작품은 기존의 텍스트와 일정한 작용/반작용의 관련을 맺게 마련이지만, 1990년대만큼 다른 텍스트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적은 없었으리라. 심지어 기존의 텍스트가 새로운 작품을 낳고, 텍스트에 대한 시도 낯설지 않게 되었다. 다른 텍스트의 현실이 실제 현실을 압도하는 정황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박남철의 비평시와 이승훈, 박상배의 메타시는 텍스트에 대한, 혹은 시라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을 드러내면서, 그러한 형식 자체가 새로운 길을 열어놓는다. 시가 시를 이야기하며 분방한 언어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여기 비하면 유강희나 나희덕의 세계는 얼마나 고요로운가. 선명한 차별성이 붉고 푸르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것은 스펙트럼의 양단을 보여줄 뿐이다그 사이에는 일곱 색깔 무지갯빛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다양한 색상들이 불연속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언어의 층위에서도 마찬가지. 유하의 "압구정동", 엄원태의 "소음"이나 장옥관의 "낙동" 처럼 구체적 현실을 지시하며 이미저리의 중심을 이루는 시어와, 장경린의 "利子", 노태맹의 "유리", 하재봉의 "발전소", 박상순의 "마라나" 처럼 고도의 상징성과 풍자성을 동반하는 언어 사이의 거리는 엄청나지만, 일정한 차별성을 유지하며 그 사이에 놓이는 시편들의 급간을 결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더구나 시는 한두 단어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니 여러 언어들이 결합하고 충돌하면서 이뤄내는 풍광은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띤. 보장하고 미묘한 만큼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기준 설정은 점점 더 힘들어진다. 시공간의 모습도, "천년 전의 왕국/樓蘭 (이진명, 「逸話)에서 "컴퓨터 시대라는 미개한 시대"(함민복, 1988, 우리가 남긴 벽화에 대하여)까지, 욕망의 몸인 "가죽 트렁크" (김언회희, 트렁크)에서 "30만개의 별이 모인 구상성단" (문복주, 번개를 타고)까지 실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이미저리, 의미망, 어조 등도 마찬가지 성격으로 이러한 목록에 추가될 수 있다.

 

각각의 요소들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복잡하게 뒤얽혀 한 편의 시를 구성하기 때문에 시에 이르는 비밀의 문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 어려운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이 "네 겹의 텍스트" (김혜순, 네 겹의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기)인지. "뚜껑 위에 또 하나의 단단한 뚜껑을 눌러" (성미정, 모자를 쓴 너)쓴 형국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물론, 아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작품도 있지만, 이제는 그런 작품조차 무슨 복선이 깔린 듯하여 쉽게 읽히는 게 오히려 불안하다. "밤송이들이, 쩍 벌어져 있다" (이윤학, 밤나무)는데 밤송이가 생각나지 않는다. "야성을 연마하려고 돼지국밥을 먹으러 간다" (최영철, 야성은 빛나다)는 행을 문자 그대로 읽기가 겁이 난다. 작품이 발하는 정서적 흐름에 감응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의 단절이 앞서니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존재론적/실존적 의미망을 중시하던 그간의 관행은 이미지의 덩어리들로 이루어진 작품을 그 자체로 이해하고 풀어놓는 일을 어렵도록 해왔다. 의미보다 이미지를 중시하는 작품은 갈수록 늘어나는데 그것을 설명할 체계적인 방법은 마련되지 않고, 외국의 이론들은 끊임없이 밀려들어 어느 것이 우리의 상황과 맞는지, 알맞게 변용할 수 있는지 점검할 여유도 없이 사용되고/버려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이 뚜렷한 방향성 없이 상호작용하여 1990년대를 소통불능의 시대로 만든 것 같다. 시와 시인, 시인과 현실, 현실과 작품, 작품과 독자 사이에 너무 많은 층위가 놓여 있어서 소통의 길이 단절된 것이다. 이러한 단절은 1980년대의 의도적/집단적 단절과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열정을 샘솟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절망을 가중시키는 단절이다. 한 권의 시집은 일관성과 독창성의 벽돌로 쌓아올린 견고한 성채지만, "지나치게 많은 저 생각들/낭비하고 낭비하여 궁색해진 저생각들" (김상미, 생각 바이러스)로 인하여, 각각의 성채가 견고해질수록 외려 전반적인 흐름은 불안하고 가난해 보이는 역설적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 1990년대 시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쓰고 있는데, 한 잡지의 부록으로 장경기의 영상시집 「夢想의 피가 도착한다. 이제 미디어도 시의 일부다. 아니, 시는 미디어의 일부다. 비디오를 켜자 "시인이 죽었다" (어느 시인의 죽음)는 목소리가 먼저 홀러나온다. 시인이 죽고, 비로소 시가 시작된다? 그렇다면, 독자가 죽고 비로소 시읽기가 시작되어야 할까?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생각난다:수많은 가정들이 상상력이란 이름으로 모여 있는 게 시 아닙니까? 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 가정이란 언젠가 증명을 통하여 참과 거짓으로 구분되게 마련이지요. 물론. 선생님 말씀대로 시라는 텍스트의 질량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독자에 따라, 역사적 상황에 따라, 혹은 그보다 훨씬 더 미미한 조건으로도 질량이 달라질 수 있지요. 시집은 그대로 있는데 열역학 제1법칙이 파괴되는 겁니다. 시는 언제나 블랙홀의 특이점 안에 있는 셈이지요. 특이점 안에서는 모든 법칙이 깨어집니다. 어떤 설명도 의미가 없지요.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한 방정식도 전체 질량이 고정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나왔으니, 전제가 부정된 지금 보면 부질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보세요. 그래도 시는 설명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고전 물리학에서 벗어나 카오스 쪽으로 가봅시다. 한 작품/시집이 가지고 있는 언어의 수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언어의 지시적/비지시적 의미와 비유적/상징적 이미지도 그 언어를 떠나서 나올 수는 없겠죠. 시는 그것을 구성하는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 다른 언어가 구성하는 곳에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인데- 아주 분명한 예를 들면, 노동의 새벽(박노해)반성(김영승) 처럼 읽을 수 없고, 그 역도 역시 마찬가지죠.-이것은 텍스트의 해석을 아무리 다양하게 한다 하더라도 결국 작품의 질량은 일정한 범위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 변인에 따라 읽을 수 있는 방법은 무한하지만. 그것은 일정한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무한이죠. 작품에 따라 범위의 크기가 다르고 읽을 수 있는 방법의 수도 다르겠지만, 무한한 듯 보이는 그 편차도 제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불규칙한 규칙성을 보여주며 나비 날개를 벗어나지 않는 로렌츠 어트렉터나 무한대의 테두리로 이루어졌지만 제한된 면적을 갖는 코흐곡선처럼 말이죠.

 

멀리 있는 예를 들 것도 없습니다. 저 다람쥐들 보세요. 지금 여기에는 284그루의 히말라야시다가 있지요. 그 중 씨앗을 맺어 다람쥐를 먹이는 게 188그루입니다. 지난 해보다 올해 방울이 적게 달렸죠? 다람쥐 수도 줄었습니다. 먹이의 양은 항상 변하지만 다람쥐들은 용케 그것을 예측해서 새끼를 낳고 기릅니다. 지금 여기는 밤나무, 잣나무, 전나무, 떡갈나무 등도 수백 그루 있으니 변수가 많지만, 어쨌든 히말라야시다가 아무리 씨를 많이 맺어도, 또 아무리 방울이 적게 달려도 일정한 한계 안에 있고, 거기에 따라 다람쥐 수도 적절하게 유지되고 있는 겁니다. 히말라야시다라는 언어가 다람쥐라는 정서를 일정한 범주 안에 수준에 묶어두는 셈이지요.

  

3. 동기감응( 同氣感應)을 향하여

 

그는 1990년대 시를 거의 읽지 않았지만, 지형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내 불평에 이론직으로 반론을 편 셈이다. 그것은,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길-그는 "과학이 확실성을 의미할 필요도 없고, 확률이 무지를 뜻하지도 않는 새로운 합리주의" (일리야 프리고 진, 「확실성의 종말)를 인용했다.-은 있게 마련이란 뜻이며, 곧 내가 말한 '불상유통' 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1990년대 시를 어느 정도 읽었고, 그 결과 '전체를 통찰' 할 필요성이 있는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하긴, '파편화한 다양성' 이나 '불상유통' 이 전체적 통찰이라면 통찰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는 끝까지 객관성을 고집했고, 나는 주관성으로 기울었던 셈이다. 나는 비평적 논리를 넘어 비평적 서정을 창출하려 했고, 그는 완벽한 방정식을 세우고자 했던 것. 우리는 개인적으로 가까이 지냈지만, 사유의 거리는 결코 좁혀질 수 없을만큼 멀어 보였다.

 

그런데, 히말라야시다와 다람쥐 이야기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비록 논리를 위한 은유지만, 아마도 이것은 그가 한 유일한 서정적 이야기일 것이다. 나만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마음을 바꾸었다. 1980년대를 단절과 열정의 시대로 읽었듯이 1990년대도 간명한 범주를 가정하여 읽기로 작정하였다. 먼저,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푸른 햇살 아래 밀어내놓는 신생(新生)의 꿈들!" (고진하, 흰줄표범나비.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에서 '죽음' '신생' 을 가져 온다. 1990년대를, 죽음/소멸의 시대며, 동시에 생명/부활의 시대로 보려는 것. 물론 죽음이나 신생이 새삼스러운 용어는 아니다. 죽음과 신생의 논리는 그리스도 이전부터 있지 않았을까. 이 세기말을 죽음의 시대로 보는 것도 이미 잘 알려진 1990년대 시의 중요한 한 측면이다. 새 생명의 샘을 찾아 자연으로 흘러드는 작품들도 그에 못지 않게 많다. 그렇지만, 비록 남루한 용어이긴 하나, 개별 작품과 특정 유형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1990년대 전체를 읽는 대표적 범주로 삼으려 한다.

 

1980년대에도 죽음이 있었던가? 있었다. 투사/열사의 죽음이. 전태일에서 시작된 이 비극적 죽음은 미래의 희망을 이끌어오는 역설적 의미망의 죽음이다. 고은이 그들의 비장한 죽음을 모두 기록했다. 전혀 다른 죽음도 있었다. 이하석의 나른한 현장, 교통사고는 죽음을 통하여 급격히 사물화(事物化)하는, 살아서도 이미 사물인 인간 존재를 보여준다. "젠장, , . 조졌군, 하고/운전수가 투덜거릴 때, 그의 구두는 황급히/하수구로 뛰어들고, 그의 반짝이는/단추들이 사방으로 흩어" 진다. 인간은 구두/단추와 마찬가지로 사물에 불과하다. 삭막한 죽음이다. 그것은 현대인의 메마른 일상을 표상한다. 그 이전에는 어땠는가? 조병화의 초월이 있고, 김소월의 체념이 있고, 제망매가의 종교적 승화, 공무도하가의 가슴아픈 광기가 있다.

 

이에 비해, 1990년대의 죽음은 처참하다. 현실적 죽음이 아니라 상징적 의미의 죽음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처절하다. "두개골은 깨어지고/가슴은 온통 갈라" "변기통 쇠줄에 목을" (이연주, 매맞는 자들의 고도」는, "때아닌 고통이 창문을 열어젖히고/터진 천정으로 쏟아지는 죽음" (채호기, 죽음). "맞아 죽은 개가 되고 싶다 (최승자, 세기말), "죽어서도 도시를 멀리 떠나 있지 못하는" (오정국, 모래무덤), 섬 한 "세기말의 밤""산송장이 넘실거린다" (남진우, 공포 영화와 함께 이 밤을). 이것을 의역하면, 죽음은 '절망/고통/자학/무의미/부조리' 와 동의어. 그것은 결핍/욕망/자본에서 배태된 것. 결국 죽음은 현실과의 격렬한 불화를 드러내는 최후 방편인 셈인데, 그것을 노래하는 주체도 부조리한 현실에 오염된 존재니 스스로도 파괴의 대상으로 추락한다. 그래서 시인들은 끝없이 몸을 토막내고 짓누르고 일그러뜨린다. "육시처참의 나는" (김언희, 백합, 백합, 백합), "유린당할수록 즐거" (박서원, 환락가)운 나는, 바로 철저히 부숴버리고 싶은 이 세계/현실 자체다. 이런 자학은 격렬한 야유로, 눈물나는 풍자로, 정교한 비판으로, 욕망의 탐닉으로 얼굴을 바꾸기도 한다. 죽음의 그림자는 "오픈카를 타고/./똥꼬치마 입은 계집애" (하재봉, 오픈카를 타고)를 회롱하는 순간에도 어김없이 뒤따라간다. 현대문명을 제재로 한 시들은 대부분 이러한 죽음의 양식을 변용하고 있다.

 

이렇게 읽으니 죽음의 시는 너무나 강렬하고 광범위하게 널려 있어서 1990년대를 온통 검붉은 핏빛으로 물들여놓는 것 같다. 그러나,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것은 문학/삶의 원형적 심상이다. 죽음은 재생을 예비한다. 죽음은 삶의 다른 이름이다. 온통 죽음으로 뒤덮인 시집에도 "아득한./" (남진우, 매혈자의 꿈)이 새어나온다. "고통이 얼마나 짙푸른 두엄이었는지/./ 버려진 시들이 움찔움찔 피어나""버섯 같은 꿈들이 튼튼한 지붕을" (이경림, 이제 닫을 시간) 이룬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어디 봄풀뿐이랴//허물벗고 몸 빠져나가는 사람도 더러 있다"(박기동, 「再活6-다시 살아나기를). 죽음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뿐 아니라 곧바로 삶과 뒤엉킨다. 송재학의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는 언어의 미세한 흐름으로 죽음과 삶이 뒤얽히고 자리를 바꾸는 섬세한 정서적 경로를 보여준다. 우리의 굿판은 죽은 자와 산 자의 만남을 눈앞에 펼쳐놓는다. 풍수지리는 죽음이 삶과 얽혀 있다는 인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데, 그 핵심 사상은 동기감응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나와 같은 기(氣)를 가진 조상은 죽어서도 나와 교감하며 삶에 간여하고 있다는 것. 이렇게, 죽음은 삶의 완전한 소멸/끝이 아니라, "羊水에 감싸여 출렁이는 봉분"(장옥관봄밤)처럼 신생/부활을 품고 있는 새로운 출발점이라는 인식은 요즘 시인들만의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이 아닐까.

 

기가 같으면, 또는 기를 맞추면 감응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생활 속에서도 혼히 겪는 일. 남의 나라 얘기지만, 그것을 과학적으로 풀었던 사람도 있다. 거짓말탐지기 전문가 백스터 (Cleve Backster)"식물과 그 보호자 간에는 거리에 상관없이 서로 특별한 교감이나 친근감이 현성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한 실험은 무려 1,120km나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졌는데도 반응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 엄청난 동기감응의 위력! 그는 일련의 실험과 관찰을 통하여 이러한 교감이 분자나 원자 혹은 그보다 더 아래 단계의 것들까지도 해당되는 듯하다."고 추정하고 있다(피터 톰킨스 외, 식물의 정신세계). 우리는 수천 년 전부터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던가. " 조???????????" (이규보, 동명왕편), 이것을 단지 신이한 한 토막 이야기로 돌린다면 우리에게 남을 문화적/정신적 유산이 얼마나 되겠는가. 주몽 앞에 놓인 강은 시련/단절의 표상이고 그것을 해소해주는 물고기들은 천명 (天命)의 표지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연과의 소통이 가능했던 당대의 일반적인 인식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리라, 문명에 길들지 않은 당대인들에게는 "문맹의 최초의" (정진규, 아름다운 지구) 자연과 '감음' 할 수 있는 '동기' 가 있었던 것. 그것이 인간 사회의 발달과 함께 다양한 형태로 변하면서 시와 이야기 속에 그 흔적을 남겨온 것.

 

동기감응은 그러므로, 시원으로 돌아가는 길이며. 새로운 미래를 여는 원동력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생명을 잉태하는 힘이다. 그로 하여 무수한 생명의 씨앗, 시들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선다. 죽음의 목소리가 너무 강하고 커서 제대로 느낄 수 없었던 생명의 합창소리 들린다. 나와 타인, 인간과 자연, 생물과 무생물이 불상유통의 벽을 허물고 교감하며 몸섞는 교성에 눈이먼다(시각이야말로 자본의 가장 충직한 시녀가 아니던가). "죽음의 냄새" 조차 "더없이 풋풋" (문인수, 그리고 또 어떤 마을 앞에 서 있었네)하고 향기롭게 다가든다. 마침내 "千佛山/몸속에 들어와 앉",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천양회, 마음의 수수받). 어둡고 일그러졌던 명사들의 얼굴이 훤히 밝아오고, 격심하게 뒤틀렸던 동사들도 편안하게 자리를 잡는다. 여기에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없다. 설명/해석은 시에 이르기 위함인데, 생명의 시들에는 몸-마음이 그리로홀러들면 그만이다. 시와, 시를 뚫고 그 존재에 이르러 감응할 올곧은 몸만 준비하면 되는 것. 그러면 저절로 "한가함과 한몸/천둥과 한몸/비와 한몸/뻐꾸기 소리와 한몸으로/나도 우주에 넘치" (정현종, 여름날)게 되리라.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사람들이 지나간다

비바람과 추위를 나무처럼 견뎌온 사람들

별과 땀과 피곤으로 나뭇등걸처럼 거칠어진 몸으로

한 그루 열 그루 백 그루 사람들이 지나간다

 

(중략)

 

 

비갠 여름날 오후의 공단천변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플라타너스가 걸어간다

 

 

-백무산, 플라타너스부분

 

 

플라타너스와 사람들은 다른 개체로 출발하지만 점차 동질적인 속성으로 뒤얽히고, 끝내 "사람"이라는  이름마저 버리며 플라타너스와 하나가 되는, 자연과 인간이 가장 조화롭게 만나는, 그야말로 "원융이 되" (백무산, 감은사지) 순간에 도달한다

 

초록의 이름을 부르면 우리의 하루가 초록이 된다 

친구여, 오늘만 紅茶를 마시고

오동나무 잎새로는 다 가릴 수 없는

저 눈부신 햇볕의 거리에 서라

 

-이기철, 초록을 노래하라부분

 

 자연에서 이기철은 언제나 당당하다. 자연스럽고 유려하게 몸을 섞는다. "通俗 세상"까지 받아들이는 여유가 있다. 그러나, 누구나 언제든지 동기감응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 인간의 교만이 '동기' 를 놓치고 덤벼들어 감응' 에 실패하는 참담함을 보이기도 한다.

 

글씨를 모르는 대낮이 마당까지 기어나온 칡덩쿨과 칡순들과 한 그루 배롱나무의 붉은 꽃잎들과 그들의 혀들과 맨살로 몸 부비고 있다가 글씨를 아는 내가 모자까지 쓰고 거기에 이르자 화들짝 놀라 한 줄금 소나기로 몸을 가리고 여름 숲속으로 숨어들었다 매우 빨랐으나 뺑소니라는 말은 가당치 않았다 상스러웠다 그런 말엔 寂減寶官이 없었다.  

들킨 건 나였다 이르지 못했다 未???에 그쳤다.   점진규, *전문

 

??는 드나들기의 실패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글씨를 모르는"/"글씨를 아는", "맨살로 몸 부비고"모자까지 쓰고" 대립되는 상황에서 동기감응이 불가능한 것은 자명한 이치. 정진규의 들은 많은 경우 자연과 하나가 되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이 작품은 오히려 실패로서 동기감응의 핵심을 선명하게 드러낸. 송재학은 "꽃나무에 달린 열매가 내 몸을 지나면서 붉어졌지만 예정된 일, 언젠가 나도 팔 벌리고 머리통을 열매로 내놓으리라" (마애불)며 윤회의 이미지를 가져온다. 동기 감응이 거시적인 시간의 흐름으로 모습을 바꾼 것. 송종규는 역사상의 특정한 시간대를 현재와 뒤얽는 새로운 변주를 보여준다. "수만 개의 나뭇잎을 매달고 있는 가문비나무 숲속에 들어가면, 하고 바스러지는/수만 컷의 시간이 겹쳐져 있다(송종규, 흑백 필름)고 노래할 때, 수만의 시간들이 겹쳐지는 지점은 그 시간을 따르는 무수한 목숨이며 사물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교감하는 자리가 된다. 림은 이천 년을 거슬러 청도와 이서국이라는 "끝도 시작도 없" (청도 그리고 伊西國 )는 공간을 하나로묶"청도 사람에게 세상을 보는 거울" (청도장-이서국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입구)을 제공하였다. 동기감응은 시간적/공간적으로 급속히 확대된다

 

또한, 시인들은 하나의 흐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격렬함이 고요를 낳고, 고요의 배후에는 격렬함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죽음의 시는 생명을 향하고 있으며, 생명의 시는 죽음을 거쳐 이루어진다. 오랜 시간"폐차장"에서 보낸 광물주의자 이하석은 처음부터 "밀양강"이며 "지리산"을 마음 깊이 품고 있었다("수줍게 쇠들을 물로 달래는 보랏빛 달개비꽃"-폐차장 2). "梨田碧海 압구정동 영화사회학자 유하도 "정글어가는 하나대" (정글어가는 하나대를 바라보며)를 잊지 못했, "세속도시"의 최승호도 "반딧불 보호구역""꿈의 " (누에)으로 읽었으며, 송재학은 "붉은빛" 격랑을 넘어서서야 "푸른빛" 고요에 닿았고, 고진하는 "껍질만으로도 눈부신" (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 박제된 시간을 견딤으로써 "황홀한 부패가/깊고 고요히 진행되는" (사천) 사천의 "고즈넉한 시간" (청띠신선나비의 시간)에 이를 수 있었던 것. 울산의 노동전사 백무산도 이제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순응하는 지휘계통"."생명의 풀무질" (인간의 시간)을 노래하고, 노동자 무장항쟁을 주창했던 박노해도 "새로운 탄생", "참된 시" (그해 겨울나무)을 이 시대 민중시의 화두로 던졌. 닫힌 세계의 벽에 끝없이 몸을 부딪치는 페미니즘도 기러운 "한솥밥 궁전" (신현림, 한솥밥 궁전으로 당신을 초대한다)에 이르려는 '여성의 몸' 찾기인 것, ""  같은 자본의 시대를 통렬하게 풍자한 차창룡도 쟁기질을 통하여 "황소/아버지/지렁이/굼벵이. 보습날에 묻어오는 뼛조각"까지 신명으로 통합하는 모습(쟁기질 1)을 보여준다. 자본의 제국을 끈질기게 비판해온 함민복도 그런 작업이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우리 선천성 그리움" (선천성 그리움) 때문이었음을 고백한다. "요한, 주검의/구애를" (모과) 저며놓은 김언희의 욕망의 트렁크도 "사람이 그리워/주둥이가 질질 끌리는 봄" (춘궁)의 자궁에서 잉태하였으며, 처참한 몸의 "파괴공법" (매맞는 자들의 고도)에 목숨을 바친 이연주"양성을 버린 동성, /몸으로의 환생" (우리라는 합성어로의 환생)을 꿈꾸며 피안의 세계로 떠나갔다.

 

이러한 상보적 이율배반이 융화/화엄/태극으로 가고 있는 도정인지, 어떤 시들은 벌써 거기에 이르렀는지아니면 전혀 다른 무엇인지 짧은 안목이 다다를 수 없는 높이여서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펼쳐놓고 보니 분명한 것은. 자연을 노래하는 서정시만 동기감응의 대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신생/동기감응을 향한 열망은 1990년대 시의 흐름에 생각보다 훨씬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죽음/불상유통의 시들도 결국 "선천성 그리움"을 배후에 깔고 있다면, 신생의 꿈은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오히려 시인들은 죽음의 격정에서 신생의 비밀을 읽는 모양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아니라, 압바스키아로스타미가 아니라, 다수의 시인들이 왕가위에 시의 촉수를 들이대는 것도, 피비린내나는 모랫바람의 절망 속에서도 기어이 피어오르는 복사꽃 사랑을 향해 온몸을 던지는 존재의 비극을 통하여 신생의 문을 열려는 열망 때문이리라.

 

이렇게, 시의 위기/죽음에 대한 무수한 우려와 논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1990년대는 마르지 않는 회망의 샘에서 신생을 길어올리고 있었던 것. 이 시대 시인들은 "어둠의 구멍 그 너머에 부활이 있다는 믿음을 굳게 붙" (문복주, 화이트홀)고 있었던 것. -웬 터무니없는 결론? 일반적으로 생각해온 복잡다양한 1990년대의 시적 지형도와 뭔가 어긋난 게 아닌가? 어디서 삐끗했을? 이제 돌아갈 길도 멀어졌으니, 다시 그를 찾아가야겠다. 그가 없으면, 그를 가르친 두 부자(夫子) 히말라야시다에게, 참다람쥐에게 직접 물어야겠다. 그들의 말을 알아듣도록, 불혹을 갓 지난 내 귀도 순하게 열릴까. 

 

 

김양헌/1957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200873일 타계하다.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동 대학원을 졸업, 1995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하고 평론집 푸줏간의 물고기, '이 해골이 니 해골이니를 출간하다. 고석규비평문학상을 받았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Title Name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8 | 이하석 | 책 머리에 file 오리들이 물에서 시를 놀고 있네 관리자 2020.08.17 3
27 차 례 관리자 2020.08.17 3
26 | 김선굉 편 | 너는 붉게 흐른다 · 콘트라베이스 · 술한 잔에 시 한 수로 관리자 2020.08.17 5
25 | 김세진 편 | 방울실잠자리 · 새벽, 숲에 들다 · 그림자의 길 관리자 2020.08.17 4
24 | 김호진 편 | 스좌좡 가는 길 · 寧國寺에서 · 나는 이미 탑이다 관리자 2020.08.17 3
23 | 문무학 편 | 잠-코의 시간 · 달과 늪 · 비비추에 관한 연상 관리자 2020.08.17 4
22 | 문인수 편 | 각축 ·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 쉬 관리자 2020.08.17 4
21 | 문형렬 편 | 언제나 갈 수 있는 곳 · 봄꿈 · 꿈에 보는 暴雪 관리자 2020.08.17 5
20 | 박기섭 편 | 그리운, 강 · 시월 · 달의 門下 관리자 2020.08.17 3
19 | 박진형 편 | 저녁밥처럼 · 새가 되고 싶은 나 · 몸나무의 추억 관리자 2020.08.17 4
18 | 서담 편 | 양수리-여의도, 차창 밖의 시퀀스 5 · 때론 폭주족이고 싶다 · 환생 관리자 2020.08.17 3
17 | 서대현 편 | 아내考 7 · 유리벽 속 거미줄 · 그림자 6 관리자 2020.08.17 4
16 | 송재학 편 |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 흰뺨검둥오리 · 닭, 극채색 볏 관리자 2020.08.17 4
15 | 엄원태 편 | 굴뚝들 · 북녘들 산업도로 · 나무는 왜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는가 관리자 2020.08.17 5
14 | 윤일현 편 | 어머니와 소풍 · 장마철 · 김천댁 관리자 2020.08.17 4
13 | 이동백 편 | 살레 지나 운문사 가는 길 · 어라연 · 靑山島 관리자 2020.08.17 4
12 | 이동순 편 | 마왕의 잠 1 · 양말 · 아버님의 일기장 관리자 2020.08.17 6
11 | 이무열 편 | '사이' 라는 말 · 겨울나기 · 어떤 흐린 날 관리자 2020.08.17 4
10 | 이유환 편 | 낙타 · 감자꽃 · 용지봉 뻐꾸기 관리자 2020.08.17 3
9 | 이정환 편 | 千年 · 獻詞 · 別辭 관리자 2020.08.17 4
8 | 이종문 편 | 봄날도 환한 봄날 · 눈 · 선풍 관리자 2020.08.17 3
7 | 이하석 편 | 투명한 속 · 초록의 길 · 늪 관리자 2020.08.17 5
6 | 장옥관 편 | 달의 뒤편 · 눈꺼풀 · 입술 관리자 2020.08.17 4
5 | 장하빈 편 | 밥통 · 개밥바라기 추억 · 어머니 관리자 2020.08.17 3
4 | 조기현 편 | 매화도 1 · 아침 연못 · 암곡 오동꽃 관리자 2020.08.17 3
» | 김양헌 편 | 1990년대 시읽기의 방법적 시론 불상유통(不相流通)/동기감응(同氣感應 ) 관리자 2020.08.17 6
2 | 박진형 | 책 뒤에 시오리 20년의 알리바이 관리자 2020.08.17 4
1 만 / 인 / 시 / 인/ 선 만 / 인 / 시 / 인/ 선 관리자 2020.08.17 4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