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구모룡)
맑고 투명한 환상
-김선굉의 시세계
김선굉의 시는 우선 회화적이다. 이는 그가 다른이의 그림에 대한 시를 쓰고 있거나 미술평론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회화에 관한 남다른 재능을 지닌 것 같다. 이러한 회화적 재능은 시적재능과 겹쳐진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들은 대체로 어떤 구도를 갖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시가 지닌 구도는, 한편으로 감정의 절제와 관련되며 다른 한편으로 시적지성의 획득과 이어진다. 그의 시는 지성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에서 감정의 직접적인 배설행위와 만나기가 어렵다.
반 조금 넘게 물을 채운 투명한 컵에
한 송이 장미가 꽃혀 있다.
그 장미빛 꽃잎은 넉장의 크고 작은 잎과
아홉 개의 독오른 가시를 거느리고
오디오 세트 위에서 혼자서 붉다.
저의 목이 길고 가늘다.
어떤 구도 속에 놓일 때
장미는 뿌리가 없어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느낀다.
내 눈이 그리로 가서 머문다.
나는 뜯어본다.
어느 부분이 가장 아름다운가.
컵인가, 줄기인가, 가시인가
짙은 녹색의 잎인가,
겹겹이 싸인 붉은 꽃잎인가.
그 판단은 늘 시간이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붉은 빛이 엷게 도는
벽지의 연속무늬가 따뜻하게 뻗어나가는 배경으로
장미는 홀로 허리의 상처를 견디고 있다.
-「실내」전문
이 시는 김선굉 시의 회화적 경항을 매우 특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오디오 세트 위, 반 넘게 물로 채워진 컵에 꽂혀 있는 한 송이 붉은 장미를 시적 대상으로 하면서 그는, 그것을 <어떤 구도〉 속에서 묘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도는 시적 감각과 겹쳐진다. 이러한 겹쳐짐은 곧 공간의식에 시간의식이 더해지는 것이다. 시적 감각은 대상을 타자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의 대상인 장미는 단순한 정물로 남지 않는다. 시인과의 정서적 교감에서 아름다움의 위계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적 위계는 다소 과장해 말할 때 시인의 전생애가 관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좁혀 말해 시인의 기억에 기인하는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경우이든 경험적 시간 혹은 구체적 삶의 간섭을 반는다. 이러한 간섭작용에 의해 마지막 3행에서와 같은 〈상처>와 <아름다움>의 연관성이 만들어진다.
장미는 훌로 허리의 상처를 견디고 있다.
이 구절에서 시적 집약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아름다움)과 <상처> 사이에 <견딤>이 매개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 회화적 시각은 시적 태도와 포개진다. 시적 대도는 시인의 삶과의 연관성을 의미한다. 물론 회화가 화가의 삶과 무관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인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자신의 삶을 감출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보이는 <아름다움>과 <상처>의 연관성은, 좀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김선굉의 시학이 지닌 한 특징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라생각한다.
상처는 아름답다.
시간은 상처 위에 오래 머문다.
-「시간은 상처 위에 오래 머문다」에서
이처럼 김선굉 시인의 시는 〈상처>를 <아름다움)으로 변용하려는 지항을 지니고 있다. 그에게서 <상처)는 인간적 삶 그 자체에서 연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삶에 대한 그의 해석은 대체로 아픔, 슬픔, 상처 그리고 죄 등이다. 그는 삶에 대하여 회의주의적인 입장에 서 있다. 이러한 그의 입장에서 그는 삶 그 자체의 질곡을 시적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보다 질곡의 삶으로부터 놓여나고 싶은 욕망을 보인다.
나는 너를 꿈꾼다.
찔레꽃 희게 핀 찔레숲 아래서 그 향기를 숨쉰다.
얼마나 오래 이 그늘에 서야
낡고 혜진 몸의 빈 푸대자루 가득
찔레 향기로 채울 수 있을까.
그 향기 뼈 속까지 스며
내 몸 향기로울 수 있을까.
추표 나이 30세,
내가 몬 프라이드 디엠은 그때
그의 목숨을 노리고
정확히 급소를 향해 달려갔을까.
순천향병원 응급실에서
48시간만에 별 차도 없이 숨을 거두고 만 그는
찔레숲 아래 서 있는 나를 보고 있을까.
한 차례 바람이 불자
찔레의 길이 향기롭게 열린다.
그 길을 따라 그는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
아니, 찔레숲을 향해 오고 있는 걸까.
내게로 전천히 다가오면서
찔레 향기로 희게 봄 바꾸는 그를 바라본다.
그는 쉽게 다가와
제 몸을 내 몸에 겹친다.
찔레 향기로 기화하는 나의 몸이여.
찔레꽃 아래서 니는 이제 너를 꿈꾼다.
살아서 향기로울 수도 있을 너를 꿈꾸는 거다.
「찔레」 전문
이 시는 개인적 삶의 가장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말하고 있다. 그 기억은 구체적으로 시인이 교통사고의 가해자가 되어 한 젊음을 죽음으로 바꾸어놓은 〈납득하기 어려운>(「김천유감」에서) 사건에 관한 것이다. 아마 시인의 생애에서 몇 안되는 가장 참혹한 경험일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육체를 지닌 인간의 삶 그것이 곧 질곡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인간은 몸의 고통에 구속되어 있다. 상처와 죄의식으로 뒤엉킨 〈몸〉들은 〈낡고 헤진 빈 푸대자루>와 같다. 이렇듯 육체는 남루하다. 특히 불가해(T)한 죽음의 기억은 우리의 몸을, 그리고 삶을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그래서 죽음은 늘 삶의 허물을 벗긴다. 이것은 지혜로운 자가 잔치집보다 초상집을 더욱 즐겨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용한 시에서 시인은 죽음의 경험과 관련된 몸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이것은 빈 몸에 영혼의 향기를 가득 채우는 일이다. 죽은 그가 <찔레 향기로 희게 몸 바꾸>어 나에게 다가오는 환상과 함께, 나 또한 〈찔레 향기로 기화>한다. 기화하는 몸! 이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그리하여 죽은 <그>와 산 〈나>가 만난다. 이러한 만남은 또한 <살아서 향기로울 수도 있을 너를 꿈꾸는 거다)
이처럼 인용한 애도시( ) 「찔레」에서와 같이 <몸>은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은유이다. 몸의 고통 /영혼의 향기라는 이원대립은, 그러므로 육체의 구속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적 삶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한다. 그래서 김선굉의 시에는 몸 /마음의 관계를 살피는 구절이 많다. 그리고 몸으로부터 가벼워지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 절실한 바 있다.
A 유월이 되자 장미는 조금씩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담배를 줄일 생각을 하면서 또 한 대의 담배를 문다.
어디 괜찮은 꽃 피우는 게 장미뿐이라만
내 유월의 오후는 늘 장미 결에서 한참을 머문다.
독오른 가시들 삼엄히 창끝 세워도 장미는 시드는 것을,
아쉬운 마음의 뒤를 몸이 따른다.
아하, 몸이 마음의 뒤를 따랐던 것을
늘 몸이 마음의 뒤를 따랐던 것을 이제 안다.
-「장미」 전문
B 마음이 낸 길을 몸이 따른다. 오늘 쏘T 여뀌풀 우거진 물가에서 챔꼼가 되니, 내가 걸어온 길들, 그 실날 끝 환히 보인다. 늘 마음이 앞섰으며 몸이 그 뒤를 따랐다. 그걸 환히 본다. 옛날에는 아름답지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산의 능선들 물 속으로 거꾸로 쳐박히고, 그 풍경을 물은 실어나른다. 뒤엉켜 깊이 스며 아득히 흐르는, 우리는 그 마르지 않는 오르가즘의 자식들, H처럼 두 관 높이 쳐들고 으아아아 내지르는 고함소리 저 물길에 섞으면, 어, 어, 어, 어 하늘로 떠오르는 몸뚱아리, 오늘은 몸이 낸 길을 마음이 따르고 있다.
-「께, 전문
A에서와 같이 몸이 마음을 따른다. 그러나 그 마음은 몸의 구속으로부터 풀려난 것이 아니다. 결국 <몸속의 마음>일 따름이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대체로 마음의 의지에 의해 몸이 움직여지는 것으로 아나 그 실상은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의지라는 것도 결국 몸에서 비롯한 의지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몸으로부터 풀려난 마음의 진정한 자유는 B에서 처럼 몸 그 자체를 해체하는 데서 찾아져야 한다. 이러한 해체는 투명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에서 시작된다. <늘 마음이 앞섰으며 몸이 그 뒤를 따랐다>는 인식은 곧 마음과 몸의 현실적 관계에 대한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이원적인 대립의 경계가 지워지는 계기가 마련된다. 그리고 생명 본래의 자발성에 동화될 길이 열린다. 이 때 <몸이 낸 길을 마음이 따르고 있다>는 표현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김선굉 시인은 몸을 지닌 인간의 굴레로부터 시적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 이러한 그의 지향은 한편으로 마음에 대한 탐구로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 〈사람의 일이 아닌 것에는 / 아직 아름다운 게 많이 남아 있다>(「시간은 상처 위에 오래 머문다」에서)는 구절에서
와 같이 인간적 삶을 배제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로 나타난다. 물론 전자와 후자는 분리되지 않는다. 그의 시가 사물화나 비인간화를 미학적 목표로 하고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 마음의 정체나 그 심연을 보다 근원적인 차원과 관련시키고자 한다. 따라서 마음에의 탐구는 시원(thil)의 유혹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별자리들, 혹은 별이 굿는 빛의 길들, 마음이 끌어당기는 무늬들, 그는 별의 약름을 화폭에 옮긴다. 오래 그 짓을 하다 이제 제 이름자도 별자리처럼 새겨넣을 줄 알게 되었다. 성좌들은 서로 끌어당기고 밀며 아득히 흐르다 어느 한 순간 또 되돌아선다. 유혹은 그 끌어당김의 이름, 그 이름끼리의 간절한 몸짓이다. 깊은 물의 속울음 같은, 그 깊은 소용돌이의 ??, 길게 내지르는 빛의 소리가 몇 억 광년의 시간을 건너 지금 그의 가슴에 쏟아지고 있다. 「유혹-오세두, 1993」 전문
물론 이 시는 화가 오세두의 「유혹」이라는 그림에 대한 메타이다. 그러나 화가의 그림에 대한 해석은 전적으로 시인의 것이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하여 시원(til)의 유혹을 말하고자 한다. 여기서 유혹은 시인의 말을 빌리면 〈끌어당김의 이름, 그 이름끼리의 간절한 몸짓〉이다. 이러한 유혹은 <깊은 물의 속울음 같은, 그 깊은 소용돌이의 슴환 길게 내지르는 빛의 소리>를 듣게 한다. 이처럼 시인은 투명한 환상의 유혹에 사로잡힌다. 그 유혹은 삶의 비속성, 환멸성을 크게 하면서 미학적인 것의 가치를 드높인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에의 지향이, 바로 삶 그 자체를 무로 돌리는 것은 아니다. 〈산다는 것이 견덤 이상>(「그대, 무사하기를 빈다」에서)이라는 시인의 생각에서 미학적 가치가 삶을 추동하는 힘으로 전화되고 있음을 알게된다. 따라서 시원의 유혹이 비인간화의 미학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 건강한 자연주의(동양적인 의미의!)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엷은 어둠이 숲 속으로 깃들고 있다. 늙은 나무들이 몸을 열어 마지막 낙조를 받아들인다. 잠시 #E을 켰다 천천히 사위어가는 숲, 왜 노을은 마음의 안으로 스며 상처를 비추는가. 저무는 물가에 서면 숲은 등 뒤에서 짐승처럼 몸을 웅크리고, 짙은 수목처럼 검은 향기 뿜어올려 사방에 뿌린다. 너른 해평의 들관에서 자라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지친 몸을 뉘고 깊이 잠들면 숲의 향기가 밤새 그들의 수고를 대신하리라. 먼발치서 또 한 채불 끄는 집 있다. 짐짓 그쪽으로 쏠렸다가 낮게 깔리는 향기여! 늙은 아카시아 밑둥에 몸 기대고 낮게 부르는 노래를 새들이 듣고 가지 옮기는 소리 고요하다. -「숲은 향기롭다」 전문
이처럼 숲의 향기는 마음의 상처와 노동의 피로를 감싼다. 비록 어둠 가운데 있으나, 생명의 자발성은 향기로운 것이다. 시인은 그 향기에 쏠리고 그 소리에 귀기울인다. 그리고 그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 여기에서 몸과 마음의 대립 그리고 그 정처없음은 사라지고 놀라운 동화()의 세계가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는 몸으로부터 도피하는 마음에서 형성되지 않는다. 그보다 몸과 함께 마음을 버리고 비우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이 과정은 「담배 피우는 97」에서처럼 <푸른 연기로 세계와 이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마음의 상상이 만들어낸다. 몸은 마음이 만드는 상상에 의하여 한결 가벼워지고 마침내 그 기화하는 투명함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투명함은 시적 차원에 있다. 시인은 늘 〈깊은 숲으로 깊이 들어가면 / 나는 항상 숲의 밖에 서 있었다>(『나는 숲의 밖에 서 있었다」에서)는 낭패를 맛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흰 빛>(「빛은 희고 눈부시다」에서), 〈반짝이는 녹색의 소리>(「눈을 감으면 잎의 소리가 들인다」에서), <청명>(「오월」에서). <희고 눈부신 비상>(「괭이 갈매기」에서), <순결과 적막> (「0에서」에서) 등으로 표현되는 맑고 투명한 것의 환상은 시인을 사로잡고 있는 가장 큰 시적 유혹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 <종교를 갖는 대신에 나는 푸른 하늘을 보겠다>(『서시」에서). (문학평론가, 한국해양대교수)